어제 내 고향마을에는 주말에 버스가 오지 않는다고 툴툴댔더니,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달린다. 심지어 무려 그것이 진보의 길이란다.
그건 진보의 길이 아니라 철저한 시장논리다. 장사가 안 되니 노선을 접고 운행을 감소시키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교통이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필수재라는 점이다. 버스가 오지 않으면 농협, 병원, 우체국 등에 가기가 어렵다.
당연히 기본 서비스와 필수재를 모두 시장의 먹잇감으로 던져놓으면 약자들이 갈려나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공동체가 부서져 내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세계화, 자유무역, 신자유주의가 시장만능주의와 긴축을 앞세운 채 전세계 농촌과 지역성을 파괴해 온 것이다.
비유하자면 지역의 혈관이랄 수 있는 대중교통을 다 잘라놓고 백날 지역소멸 타령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신공항이나 관제 개발사업처럼 특정 세력의 호주머니를 불리우는 짓으로는 어림도 없다.
전 세계가 엉망이다 보니 신자유주의자가 진보를 참칭하는 사태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보자. 국내에서 버스 무상화를 시작했던 청송군은 중요한 분기점을 제공했다. 버스를 무상화 하면 지역에 사는 청소년과 노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지역의 활력을 북돋울 거라고 생각해 만든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게 옳은 판단이었다.
청송군이 요금을 무료화 한 이후 6개월간 운영 효과를 조사해봤는데, 종전 대비 이용객이 약 25% 증가했다. 무상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버스회사에 6개월간 1억6500만원을 지원했는데, 지역경제 효과는 약 10배 높은 15억~20억원으로 분석됐다. 무엇보다 시장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질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청송군의 무료화 정책이 호응을 얻자 전국 지자체에서 다양한 형태로 벤치마킹하고 있다. 다양한 지역에서 그 뒤를 걷는 중이다. 청송군을 시작으로 완도군, 봉화군, 진천군, 울진군 등으로 계속 바톤이 건네지고 있다.
완도군의 경우 군내에 35개 노선이 있는데, 무료화 시행 이후 이용객의 20~30%가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승객들도 편하지만, 거스름돈을 내주는 시간이 줄어 운행 속도도 더 빨라지고 운전 기사들도 버스 운행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이점이 따른다.
무상화에 더해, 버스 공영제, 노선 복원, 다변화된 버스 정책이 뒤따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물론 버스 정책 하나로 지역이 활성화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버스 무상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정부 정책이 성장이나 개발이 아니라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을 돌보는 데 집중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지역적 활기가 생길 거라는 점이다. 대중교통, 보건의료, 교육 등 돌봄과 사회적 재생산, 공동체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자연히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들기 마련이다.
병원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홀로 서 있는 단 한 명의 시골 노인을 향해 달려가는 버스가 존재할 때, 비로소 그 지역은 살 만한 곳이 되지 않겠나.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
이송희일
1999년 첫 단편영화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성소수자들의 슬픔, 10대들의 외로움과 아픔,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 등을 섬세하면서 강렬한 연출로 그려온 그는, 2006년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끌어 한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후회하지 않아>, <백야>, <야간비행>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홍세화 선생과 대담집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