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맨발
예수님이 갈릴래아 흙바람 속을 거니실 때 맨발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루카 10,4) 가라고 했다. 샌들을 신었다 해도, 마르고 닳도록 신었을 것이다. 그래서 샌들 사이로 흙먼지가 들어오고, 돌부리에 채이면 어김없이 발에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그분이야 태어날 때부터 빈민이요, 노동자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고, 스승이 되어서도 그 무리가 모두 다른 사람의 선의에 기대 탁발하는 신세이고 보니, 아무리 제자가 많아도 ‘맨발’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복음선포 사명을 수행하는 자는 누구나 ‘맨발의 청춘’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 맨발인 채로 살아가는 가난한 민중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없다. 그들에게 행복하다, 말할 수 없다. 맨발이어도 행복한 이가 그분이고 그분의 제자들이어야 했다.
그리스도인은 튼튼한 가죽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그늘 안에서만 안심하는 사람들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 이유로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선포하고 주교들이 제후들처럼 대접받으면서, 맨발의 청춘은 사막의 은수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성직은 가난한 이들의 계급상승의 창구가 되고, 심지어 성직을 팔고 사는 이도 있었다고 하니, 맨발의 예수를 기억하고, 맨발의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것은 시대의 어리석음이 되었다. 다만 그 어리석음이 오히려 거룩하다는 생각을 다시 불러일으킨 자가 있으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다. 허나, 이 분을 스승으로 따르는 수도자들 가운데 정작 프란치스코처럼 맨발로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누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라며, 적절한 타협을 미덕으로 여긴다.
문익환의 발바닥
예전에 예수살이공동체 제자교육을 받으면서, 맨발 수행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이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돌아올 차비만 주고 참가자들을 맨발로 거리에 내보낸다. 맨발로 돌아다니며, 제 몸으로 일을 해서 밥을 먹고 돌아오라는 수행법이다. 그 쑥스럽고 난감함이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하나뿐이다. 지하철 인근 길바닥에 떨어진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를 맨발로 밟았다. 쑥뜸을 뜬다고 할 때는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난데없이 발바닥을 찌르고 오르는 꽁초의 뜨거움이란 ‘아프다’는 말로 부족하다. 발바닥으로 세상을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부처님의 길이든, 예수님의 길이든, 수행자의 삶은 고달프다. 발바닥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문익환 목사님이 아득한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히브리 민중사>(삼민사, 1990)를 지은 목사님은 평생 민중 역사의 길바닥에서 사셨고, 먼저 이승을 떠난 박종철이며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부르다 목이 쉬셨다고 한다. 그분은 1994년 1월 18일 오후 8시 20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분은 가셨지만 영결식이 있던 대학로에는 축복처럼 하얗게 눈이 내렸다. 이 광경을 자캐오처럼 서울대 의대 정문 옆 담벼락에 올라가 지켜보았다. 그분은 살아생전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노래를 불렀다.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 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 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국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난 발바닥으로’라는 이 시를 읽으면, 문익환 목사님이 어떤 분이신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평생의 갈망, 평생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시와 하나가 된 분 앞에서, 나의 맨발을 생각한다. 부끄러운 각질과 부수어진 발톱을 생각한다. 온몸의 압력을 견디며 그래도 어딘가로 나를 가게 해 주었던 고마운 발바닥이다. 이 몸이 다하면, 그제야 온몸과 나란히 누울 발바닥이다. 그 맨발과 발바닥을 떠올리며 스승을 생각한다. 그분들의 ‘낮은 곳으로만 향하던’ 사랑을 생각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