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가 맞는 봉헌 축일은 ‘진짜’ 사랑이 갖는 근원이 무엇인지를 곱씹게 한다. 육신을 입고 당신 성전에 ‘봉헌’되신 하느님의 이 ‘사건’은 이미 예언자들로부터 예고되어온 오랜 일이다. 말라키 3장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말라1,2) 하느님의 심정을 알지 않고는 ‘봉헌’이 갖는 속뜻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는 사랑이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신 분”으로서, “죽음의 공포에 붙들려 종살이에 얽매인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히브2,14-15) 오신 분임을 천명한다. 당신이 못내 사랑하던 이들이 고통의 늪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어미’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단 걸음에 세상을 뚫고 내달리신 분이라는 거다.
시메온은 이 아기가 장차 어떤 고통과 위업을 이루어낼 지 예고한다.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2,34)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하느님이 인간을 이토록 돌보고 사랑하시는지 알아들을 길이 없다. 사람들이 말라키에게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1,2)하고 물을 때도 그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말로서 설명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처럼 절체절명의 ‘사건’으로서 성전에 입성하신다. 그것이 사랑을 “봉헌”으로 명명케 한 ‘사건’이고, 교회는 오늘, 그 사건을 우리의 사건이 되게 한다.
사랑의 특징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설명이 불가하다. 사랑은 나의 의지와 결심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고, 또 ‘강제’되는 일이기에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마치 느닷없는 ‘사건’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세기의 비극적 사랑인 ‘로미오와 줄리엣’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빠져든 선남선녀의 사랑도 설명 불가하긴 마찬가지다.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스러지고, 또 일어서면서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왔다. 항거하다 죽어간 영령들, 살아서 고통받는 이들, 무명의 의인들 모두 한결같이 “그렇게 밖에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불의에 대한 저항 역시 느닷없이 사랑에 빠지는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은 무수한 형태로 발현하고 육화 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힘을 만들어왔다. ‘하얼빈’ 독립투사들의 삶이 그러했고, 5.18 광주의 봄이 또 그러했다. 2024년 12.3 “계엄 포고령”이 터지자마자 즉각 국회의사당 앞으로 내달린 시민들도 그러했다.
무장군대와 장갑차를 막아섰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그들은 ‘무섭고 두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12월4일 새벽, “계엄해제”가 공포되고 나서야 이 용맹한 사람들은 마치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이 장면을 돌려보고, 또 돌려 보면서 아직도 가슴 한가득 먹먹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와는 전혀 다른 극단에 선 사람들(세계)을 생각한다. 법원 난입을 서슴지 않던 윤석열 극렬 지지자들과 광신도들, 그리고 제2, 제3의 윤석열을 만들어 내기 위해 판을 짜는 세력들의 암약과 이 말도 안되는 망국적 상황에도 국민 네 명 중 한 명은 윤석열을 지지한다는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과 그것을 교시처럼 받드는 자들을 속수무책 바라보는 일도 괴롭지만, 지금껏 반복된 폭력에 당하면서도 정작 그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현실이 더더욱 괴롭다.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선악을 솎아내는 일은 사실 일도 아니다. 가짜의 휘하에 놀아나면서도 그것을 ‘진짜’로 알고 사는 것, 무엇이 참인지 모조품인지 가리지도 못하는 채 자부심만 가득한 것, 체제의 허구를 알면서도 남의 일처럼 여기고, 진실로 포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속는 줄도 모르고 속으면서 신념화 하는 것이 두렵고, 이런 의구심조차 의심하지 않는 개인과 공동체, 종교, 사회, 국가 시스템이 두렵다.
우상이 내미는 통치 조건은 아주 단순하다. 단 하나면 충분하다. 세계가 속는 것이다. 속는 세계를 만드는 것, 자신들이 만든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분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을 가짜로 알아보고, ‘허구’라고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세계에 대해 ‘우상’이니, 환영이니, 거짓말이니, 하면서 딱지(명명)를 붙이고 선동하며 부추겨 세우는 자들이다. 왜 저들이 언론, 미디어의 생태계를 무력화시키는 데 광분하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영구집권의 유일한 발판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수 천년 예언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추방하고, 박해한 이유도 다 그 때문이 아닌가..
어둠이 짙을수록 교회가 봉헌 ‘사건’의 중심이 되길 바란다. 악의 연대가 아무리 극악스럽다 해도 정의의 연대를 이길 수는 없는 것처럼, 매일 불안과 안도를 널뛰며 보내지만, 그래도 사랑으로 맺어진 굳건한 연대를 이길 재간은 없다. 가짜들이 활보하고, 조직적으로 설계된 무장 권력이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는 없다. 이 간단한 명제가 결국 승리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계엄의 밤을 저지한 시민의 힘은 이후, K-응원봉, K-시위, K-키세스로 불리우는 숭고한 밤을 만들어 내며 오늘도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 밤이라 하더라도, 신 새벽은 오고야 만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