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 가면서 제목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뜻이 궁금했다. ‘흥미로운 공간’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interest를 독일어로 번역하면 ‘이익을 주는’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니 그 또한 흥미로웠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후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 실제 뜻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싼 40Km² 지역을 일컫는 명칭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나치 친위대가 사용했던 사악한 의도가 담긴 완곡한 어구 중 하나인데 당시 나치는 해당 지역의 농지를 몰수하고 노동력을 강제 착취하는 등의 이득을 취했다고 하는데 이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단다. 그러고 보니 ‘interest’가 왜 ‘이익을 주는’ 이라고 번역되는지 이해가 되었다.
영화는 스크린에 아무런 장면도 나오지 않고 약 3분정도의 시끄러운 ‘소리’로 시작된다. 그 ‘소리’는 철을 때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소리 같기도 하여 보는 이들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듣는 이들의 인내심을 요하는 ‘소음’ 그 자체였다. 그리고는 바로 아름다운 자연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루돌프 회스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회스 가족의 집 담장 너머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고 그곳에서는 매일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가스실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사람들을 소각하면 올라오는 굴뚝연기, 매캐한 냄새들이 스크린에 보이진 않지만 배경처럼 깔려있다. 감독은 여느 홀로코스트 영화처럼 사람들이 죽거나 울부짖는 장면을 단 한 컷도 노출시키지 않는다.
주인공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으로 수용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데 몰두하는 ‘일중독’자다. 회스가 유대인들을 더 많이 효율적으로 학살하기 위해 가스실 건축을 고민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회의하는 모습은 너무 차분하고 진지해서 더 잔인하고 불쾌했다. 그의 아내 헤드윅은 남편의 지위와 부를 누리며 안락한 삶을 살아간다. 남편이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난 뒤에 얻은 모피 코트나 치약 속에 숨겨둔 다이아몬드를 받아들고 기뻐하고 뿌듯해한다.
그녀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사람도, 묵묵히 집안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유대인들이다. 피해자인 그들을 종처럼 부리면서 가해자인 그녀는 ‘아우슈비츠의 여왕’처럼 살아간다. 회스부부의 자녀들 역시 아름다운 정원에서 뛰어 놀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지만, 밤에는 수용소에서 가져 온 유대인들의 금이빨을 세어보기도 하고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는 놀이를 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렇듯 회스 가족의 일상은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병들어 있는 삶’이라는 것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그들의 집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이에는 담장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 담장을 사이에 두고 어떤 이는 부유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어떤 이는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회스 가족 중 그 누구도 담장 너머의 소리나 울부짖음, 절규, 냄새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 철저한 무관심이 보는 이들을 불쾌하게 하고 소름끼치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책감을 소환한다.
지금까지 본 홀로코스트 영화에서는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을, 표정을, 소각 열기의 냄새를 직접 눈으로 보고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을 ‘천하에 나쁜 놈들’이라고 대놓고 욕하고 지적하고 비난할 수 있었다. 그들 탓을 하고 나면 우리는 죄책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끔찍한 장면을 단 한 장면도 보여주지 않는다. 담장 너머에서는 폭력과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그 시간에 담장 안에 있는 그들은 늘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기고 건배를 한다. 이 영화가 더 끔찍한 이유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과 죄책감이 올라왔다. 우리 역시 제2, 제3의 회스가 아닐까?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유로 담장 너머에서 누가 죽어 가는지, 누가 신음하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열심히만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폭염 속에서 강제 퇴거에 내 몰린 회현역 쪽방 주민들, 전주 제지 공장에서 설비 기계를 점검하다 숨진 19살 노동자, 화성 리튬전지 폭발 참사로 숨진 이주민 노동자들의 삶과 내 삶은 어떻게 다른가? 이어져 있기는 한가? 그들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감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무관심하다면 나는 회스 가족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나 역시 시대와 방법만 다른 제2의 회스니까!
2019년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악의 평범성’,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는 담론을 알게 되었을 때 ‘아하!’하고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담론을 넘어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루돌프 회스 가족을 통해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 눈물을 흘리는 능력을 잃어버려 공범이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대세다. ‘인생 다 각자 살아가는 것’ 이라는 뜻 일게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내가 살아가는 삶에는 반드시 ‘당신’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모두 이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고 싶어 한다. 인정하면 귀찮고 불편하니까, 내어 주어야 하니까. 교회 역시 다르지 않다. 지금같이 혼탁하고 암울한 시기에 교회의 ‘침묵’은 ‘직무유기’요, 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교회 공동체’라고 누가 말했는가? 교회에는 더 이상 공동체는 없다. 친목단체가 있을 뿐이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침묵’으로 일관하는 교회는 더 이상 권위도 매력도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박물관에 두 명의 여성 청소부가 표정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창문을 닦고 걸레질을 한다. 수용소 박물관 양옆에 기다란 유리창 안에는 수를 셀 수도 없는 임자 없는 신발, 목발, 죄수복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기괴한 장면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영화 첫 장면처럼 또 그 ‘소리’가 들린다. 세상의 모든 신음소리를 모아놓은 소리라고 한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엔딩 크레딧을 다 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영화관을 빠져 나왔다.
감독은 왜 하필 이 시기에 홀로코스트 영화를 세상에 내 놓을 생각을 했을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 에서는 지금도 전쟁으로 가장 약한 자들이 고통 받고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담 너머 불구경’ 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이런 우리에게 불편해 하라고, 침묵하지 말고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라고, 눈물을 흘리는 능력을 되찾으라고, 비판적 사유를 하라고, 질문 좀 하고 살라고 호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솔직히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이 글을 쓰게 만드는 나의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 역시 감독의 호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잠을 설치고, 이 글을 써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졌다는 것이 나의 작은 대답이라면 대답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꼭 보시라! 그리고 죄책감도 느끼시고 불편함도 가지시라! ‘나는 너의 다른 이름’임을, 우리 모두는 ‘이어져 있음’을 기억하시라! 이 기억만이 철옹성 같은 담장을 허물 수 있는 우리에게 남은 실낱같은 희망임을 잊지 마시라!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