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하우스의 젊은이들 2 - ‘나’의 성소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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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하우스의 젊은이들 2 - ‘나’의 성소를 찾아서
  • 주은경
  • 승인 2024.10.21 18: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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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경의 순례여행 마돈나하우스 20화

오전 10시가 훨씬 지나 일어났다. 이렇게 늦은 아침은 처음이었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은 완벽한 크리스마스 휴일. 아침과 점심은 주방에서 각자 먹고 싶은 걸 해먹는 날이라 했다. 소시지, 양파, 달걀, 바게트, 우유, 치즈, 버터, 잼, 늘 먹던 재료들이지만 이런 소소한 자유가 꿀맛 같았다.

연휴기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수련생 과정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지난 번 화장실 청소하는 알렉스에 이어, 이번에는 남자 수련생들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먼저 영적 독서시간에 내게 관련된 책의 페이지를 찾아주던 친절한 마이클을 만났다.

스무 살부터 성소를 찾았던 마이클

마이클. 스무 살 무렵 마음에 뭔가가 일어났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는 대학의 예수회 사제를 만나며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했다. 종교공동체에 매력을 느껴 베네딕도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등 여러 공동체를 알아보았다. 그러다 뉴욕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찾아가 1주일을 체험했다. 침대도 없이 바닥에서 자는 청빈하고 단순한 삶은 매력적이었다.

 

“그곳의 성소담당자(vocation director)는 나에게 이렇게 권유했어요. ‘일단 남은 6개월의 대학생활을 끝내고, 1년간 성소 식별 기간을 가져보세요. 프란치스코 성지에서 잔디 깎는 일을 하거나, 미국의 테레사 수도회에서 1년 동안 자원활동을 할 수도 있어요. 캐나다의 마돈나하우스도 생각해 보세요’라고. 그때가 21살이었어요.

인터넷에서 마돈나하우스를 검색해봤는데 처음엔 좀 이상했어요. 마돈나하우스의 상징인 성모상 사진 보셨죠? 두 팔 벌리듯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의 형상도 그렇고. 그런데 청년들을 위한 성소 식별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한번 시도해보자 마음먹고 전화를 했어요. 대학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 돈이 없는데 프로그램 참여비용이 얼마인가 물었죠. 그랬더니 전화 받은 신부님이 ‘just your life!’ 하느님께 당신의 삶만 드리면 된다 하는 거예요. 여기에 당신의 성소가 있는지는 주님만이 아신다면서.

당장 10월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 약 6개월 동안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하지만 확실하게 여기가 나의 성소라는 느낌이 없었어요. 다만 여기 농장에서 농사일을 배워보고 싶었죠. 어릴 때 농장에서 자랐지만, 규모가 커서 기계로 농사를 지었어요. 저는 기계 농사 말고 마돈나하우스의 생태 농장에서 게스트로 일하면서 농사일을 배우고 싶었어요.”

이렇게 마돈나하우스와 인연을 맺고 나서도 그는 다른 공동체를 여럿 알아보았다. 뉴욕 빈민가에는 극빈자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도하는 공동체나 선교회가 있었다. 그곳 무료급식소에서 1년 동안 자원 활동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마돈나하우스의 영적 상담자 신부님과 대화도 하고, 다른 멤버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때 마이클에겐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세상 사람들은 굶어죽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이 외딴 시골에서 장작 패고 눈이나 치우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삶이 세상에 도움이 될까? 세상 사람들이 마돈나하우스가 있는 줄도 모르는데 어떤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어요.”

마이클의 이 질문은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답을 얻었을까?

“하루는 컴버미어 성모상 앞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어요. 좋은 흙은 좋은 씨앗, 즉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잘 자란다는 내용이었어요. 성모님이야말로 좋은 씨앗을 자라게 해주는 좋은 흙이라는 점을 깨달았어요.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8,16). 이 말씀도 울림이 컸죠. 나는 이것이 성모님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성모님은 나사렛에서 정말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사셨거든요. 그저 평범하게 청소하고 집안일을 하는 단순한 삶. 하지만 이것은 모두 주님과 일치하기 위한 삶이었어요.

주님은 이곳을 성모님의 공간으로 만들어내신 거예요. 성모님은 주님과 일치하는 삶과 사랑을 매우 평범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드러내신 거구요. 그 삶으로부터 세상으로 빛이 퍼져나가는 거예요. 마돈나하우스만이 유일한 성모님의 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모님은 세상 여기저기에 작은 집을 많이 갖고 계시죠. 하지만 여긴 아주 특별한 곳이고, 저는 성모님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이 집에 초대받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이곳의 스탭이 되기 위해 수련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마돈나하우스의 삶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그 자신의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얻었는지는 더 묻지 못했다. 그 때가 1999년. 그는 애드먼턴의 마돈나하우스 필드하우스에 배정받아 일했다. 2001년에는 마돈나하우스 본부의 농장에서 1년 동안 농사짓고 치즈를 만들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다음엔 리자이나에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2년 동안 지냈다. 그는 다시 농장에서 일하기를 원했지만, 마돈나하우스의 디렉터는 벨기에의 필드하우스로 가라고 권유했다.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어를 해야 했어요. ‘나는 프랑스어를 못해요’ 했더니, ‘배우면 된다’는 거예요. 사실은 프랑스어 배우기 싫었어요. 하지만 결국은 그곳에 가서 행복하게 잘 지내다 올해 2007년 11월에 여기 본부로 돌아왔어요. 지금은 농장에서 일해서 좋아요.”

주방에서 해야 할 일 있다고 자리를 떠나며 마이클이 내게 말했다.

“우리는 두 개의 삶을 살아요. 주님께 기도하는 생활과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삶. 그게 캐서린 도허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이죠. 그 두 가지 삶을 하나가 되게 하라는 가르침. 그 삶을 통해 성모님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어요. 그래서 이곳의 삶이 아름다운 겁니다.”

 

여행과 정치, 사회경험이 많았던 데릭

데릭. 갈색 곱슬머리에 호리호리한 남자. 내가 만났을 당시 37살이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부모님과 갈등을 피하려고 간신히 미사에 나가는 정도였다. 때로는 성당에 나가는 것도 미사에 참여하는 것도 싫어했다. 다만 혼자 기도하는 것은 좋아했다. 나이 스무 살부터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자유롭게 살았다.

“여행을 많이 했어요. 23살부터 인도, 남아메리카,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일하는 걸 좋아했죠. 볼리비아에서는 대학교, 가이아나에서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래프팅 가이드, 모델도 해봤어요. 온갖 일을 해봤죠. 인도에 있을 때는 농장에서 조경 일도 해봤고, 멕시코에서는 습지 복원 일도 했어요. 조경 일도 하고 수질 정화작업도 해봤죠. 정말 재미있었어요.”

나이 서른이 되면서 데릭은 고향 오타와로 돌아와 정부 부처(자원부)에서 잡지 기사를 작성하고 브리핑 노트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야생 및 해양 생태 관련 부서에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일하면서 출판과 TV, 라디오 인터뷰 업무를 담당했다. 탄탄한 직장이었다. 그런데 31세가 되면서 어떤 계기로 공동체와 영성에 관심이 깊어졌다.

“일단 6개월 동안 직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죠. 물론 이게 맞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좋아하는 일이었고 상사도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일단 6개월 동안 공동체 일을 돕거나 소년범 등 힘든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어요. 매일 영성 훈련을 하고, 환경 보호하는 일도 했어요.”

마돈나하우스에는 6년 전인 2001년에 처음 와 2주일 동안 머물렀다. 그때 뿌스띠니아에서 침묵과 고요의 시간을 경험했다.

“캐서린 도허티는 뿌스띠니아를 그노시스(gnosis) 즉 신비적 직관이라 했죠.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거라고. 여기서 겸손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배웠어요. 그때 직장을 완전히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겠다 결심했어요. 하지만 여기에 정착할 생각은 없었어요. 방황을 많이 했어요.”

여행을 계속할까? 공부를 더 할까, 정치를 할까? 그러다 여행과 정치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었다.

“여행을 통해서 분명 배우는 게 있죠.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여행이 필요하지 않아요.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나의 내면에 관한 거예요. 그 전엔 나의 직업상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요. 여기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곳이에요. 스스로 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모습은 어느 나라에 가도 보기 힘들어요. 많은 교육을 받고 여행을 많이 다니고 성공한 삶을 살아도 불행한 사람들을 많이 봤거든요.”

정치와 사회복지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그가 마돈나하우스의 생활을 선택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나는 사회운동, 환경운동에 참여했어요. 캐나다 녹색당에서 정치활동도 했죠. 그런데 운동가들이 행복하지 못해요. 절망감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은 의도는 좋지만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성취를 원해요. 사회복지제도 역시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아요.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도 자살률이 높죠. 지금 나에겐 정치보다 주님이 더욱 중요해요. 주님 없이 행복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매일의 삶에서 성장하는 거예요. 시편 50장처럼. ‘제 잘못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제 허물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나요.”

서로 사랑하고 매일 성장하는 삶. 이곳에서 기도하고 일하며 그가 가장 크게 감동한 것이 있었다. 마돈나하우스에서는 노인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사회에서 나이 들어 신체적 능력이 약해지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꼭 자본주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선 노인들이 공동체를 위해 역할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요.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살고 싶어요.”

‘나이 들면 마돈나하우스의 노인처럼 살고 싶다’는 데릭의 얘기에 나도 깊이 공감했다. 이것은 한국에서 뭔가를 이루려 하는 사람들도 배워야 할 점이라 생각했다. 사회변화를 위해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다. 하지만 후배들의 눈에 그런 삶을 사는 선배들의 삶이 행복한가. 저렇게 살며 나이 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이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수련생이 종신서원을 하려면 7년의 시간이

매년 평균 500여 명의 게스트들이 찾아온다는 마돈나하우스. 게스트가 이곳의 멤버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2년의 수련과정이 필요하다.

수련을 원하는 여자, 남자는 각각의 디렉터 및 사제와 상담한 후 청원이 받아들여지면 수련생(applicant)이 된다. 그 후에 심화과정(formation)에 입문한다. 교육 담당 스탭과 함께 생활하며 마돈나하우스의 역사와 조직구조, 이곳의 헌장 같은 ‘작은 사명’(little mandate)과 캐서린 도허티의 정신에 대해 학습한다. 그 다음 일터에 배정되어 심화적인 훈련을 받는다. 수련생활 2년을 마치면 서원을 하는데, 이때 마돈나하우스의 모토인 가난, 순결, 복종 서약을 한다.

그 다음 7년간 서원이 이어지는데, 처음에는 1년 후, 그 뒤로는 2년마다 서원을 해서 세 번 진행된다. (1+2+2+2=7) 이렇게 7년이 지나면 마지막으로 종신서원을 하고 정식 스탭이 된다. 그동안 필드하우스에 배정받아 여러 경험을 쌓는다. 그동안 평생 여기서 살 수 있는지, 이곳이 자신의 성소인지 결정한다.

두 사람의 다른 길

내가 2007년 마이클과 데릭을 인터뷰하고 16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마이클은 201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4년 동안 영국의 필드하우스에 있다가 2024년 본부 컴버미어로 복귀했다. 그는 현재 마돈나하우스의 가장 젊은 사제라고 한다.

반면에 데릭은 종신서원을 포기하고 2013년에 마돈나하우스를 떠났다. 후에 이곳의 스탭이었던 여성과 결혼해 빅토리아에 살면서 밴쿠버의 마돈나하우스와 연락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데. 최근엔 지방선거에 녹색당 후보로 나서는 등 지역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의 집 일부를 시리아 난민에게 세를 내주기도 하고, 주거문제 등 일상의 갈등해결에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데릭이 왜 마돈나하우스를 떠났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6년 동안 영성의 삶을 경험한 그의 사회생활과 정치활동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마이클과 데릭, 두 남자의 완전히 대비되는 길.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치열하게 자신의 성소를 선택했으리라 믿는다. 그들의 삶에 축복의 마음을 보낸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 현장에 가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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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 2024-10-22 18:14:27
기도하는 생활과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삶. 그 두 가지 삶을 하나가 되게 하라는 캐서린 도허티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봅니다.
주샘 글을 읽으며 복닥거렸던 마음이 다시금 순해지는 걸 느낍니다.

마이클과 데릭, 그리고 언제나 좋은 걸 나누려는 주은경 샘의 앞날에 저도 축복의 마음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