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토) 오후 2시 30분부터 성분도 은혜의 뜰에서 가톨릭일꾼 월례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번 미사는 한국교회에서 ‘평신도신학’을 개척했던 양한모 선생을 추모합니다. 그리고 2부에서는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인 김유철 시인을 초대하여 “북한 천주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입니다. 김유철 시인은 지난 20년 동안 민족화해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바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갈등상황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가 고민해야 할 통일문제와 교회문제를 살펴볼 것입니다.
1. 일시: 10월 19일(토) 오후 2시30분
2. 장소: 성분도 은혜의 뜰 (02-318-2425)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 한강대로104길 45-3)
3. 프로그램:
1부 미사: 양한모 추모미[중간에 식사와 친교]
2부 강의: “북한 천주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강사: 김유철 삶예술연구소 대표)
4. 참가비: 1만원
이번 미사부터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농협 352-1189 4554-13 (예금주: 한상봉-가톨릭일꾼)
4. 문의: 031-941-2736
5. 참가신청: 아래 주소 클릭하시고 신청하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월례미사 참가신청합니다.
<양한모 선생은 누구인가?>
양한모 선생은 1968년에 정의채 신부와의 철학논쟁을 거쳐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사상적 전환을 하고, 1971년 만 50세의 나이에 가톨릭신학대학에 청강생으로 등록했습니다. 5년에 걸쳐 신학대학 전 과정을 수료한 그는 1982년에 <신도론>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평신도신학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으며, 1990년에 <신도, 그 하찮은 존재인가>를 통해 ‘신도신학’의 기치를 높이 들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2년 10월 8일 아까운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 양한모 선생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셈이지만, 교회에 관한 그분의 문제 제기를 여전히 유효합니다. 레오 13세 교종은 “교회에서 성직자에게 복종하고 성직자들이 명령하는 대로 잘 실행하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것이 신도의 특징”이라고 말했고, 이브 콩가르의 <신도신학서설>에서는 어느 추기경이 “신도란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어서 기도하고, 강론대 앞에서는 앉아서 듣고, 손은 항상 지갑에 넣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을 비판합니다. 그동안 가톨릭교회에서는 21차례에 걸친 공의회가 있었으나 신도의 문제를 한 번도 다룬 적이 없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와서야 처음으로 정식 의제로 취급하게 되었다고 양한모 선생은 지적합니다.
양한모 선생은 ‘신도의 해방’을 주장하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성직자나 신도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연구와 사색의 정당한 자유와 각기 전문 분야에 대한 자기 의견을 겸허하고 용감하게 발표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을 인용하며 “신도들은 고정된 전통적 신앙 체계 안에 움츠러드는 좁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신도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양한모 선생은 “신학은 일정한 전문가의 특수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의 일”이며 “어느 특정한 시대와 문화 가운데에서 그리스도 신자가 자기의 신앙과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체험에 대해서 행하는 성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신도신학이 신자들에게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해답’을 주어야 하는데, “많은 신도들이 일상생활과 관련성이 희박한 강론에서 별로 의미를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 시민 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교리와의 괴리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양한모 선생은 ‘평신도는 협조자가 아니라 성직자의 동역자요 파트너’라고 규정하고 무엇보다 용어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평신도’를 ‘신도’로 고쳐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신도를 가리키는 말은 희랍어로 ‘라이코스’인데 “속되다, 무지한 피지배 계급”이란 뜻입니다. 영어 표기인 레이맨(Layman) 역시 “문외한, 비전문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평신도 역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축성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한편 양한모 선생은 1949년에 공산주의에서 벗어나고, 1968년 가톨릭에 귀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1974년 <복음과 사회와 교회>를 시작으로 <신도론> 등을 집필하고, 1972년에 <창조>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나온 뒤 평신도사도직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80년에는 광주대교구 김성용 신부와 서울대교구 오태순 신부와 함께 광주항쟁 당시 벌어진 참상을 담은 영상 기록물(비디오테이프 ‘찢어진 기폭’)을 제작하여 해외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일치위원회(1974년),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1976년),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신도협의회(1978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1981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북한선교위원회(1981년), 가톨릭통일사목연구소(1986년)에서 중요한 몫을 감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