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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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10.2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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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장일순 평전>을 지으면서 권정생, 전우익, 이철수를 만나고, 그이들 사이를 엮어주었던 분이 이현주 목사님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 참에 <한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이현주, 신앙과지성사, 2013)를 다시 읽어 보았는데, 새삼 새록 그분과의 인연이 삼삼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동화작가로 부르기도 하고, 영성철학가로 도인(道人)으로 부르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분을 다만 ‘아무개 목사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분은 1971년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한기독교서회, 크리스찬아카데미, 대한성서공회 등을 거쳐 울진의 죽변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성공회 대성당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굳이 그분을 부른다면 ‘목사로 수행하는 작가’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평소 하시는 일이라면, 집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부르는 이가 있으면 찾아가 이야기 나누고, 책을 읽다가 좋은 글 만나면 번역도 하고, 산책도 합니다. 지금은 충주에 머물며 주로 순천에 있는 ‘사랑어린학교’에서 김민해 목사님과 더불어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도반으로 삼아 마음을 나누고 있다고 해요. 어느 교단에도 얽매이지 않고, 공간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물처럼 바람처럼 다니시니, 그래요, 그분이 지은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사시는 것이지요. 내가 제일 먼저 그분의 이름을 들었던 것도 가톨릭계 출판사인 '생활성서'에서 출간한 <예수를 만난 사람들>(2007)이었지요.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허물을 넘어서는 자비

이현주 목사님을 강진에 있는 남녘교회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아주 고전적인 시골교회입니다. <참꽃 피는 마을>이라는 주보를 손글씨로 써서 발행하던 임의진 목사가 전임목회자였던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곳입니다. 할머니처럼 곱게 늙으신 원로목사님과 도인처럼 수염을 기른 이현주 목사님과 아직 젊었던 임의진 목사님과 제가 사랑방에 둘러앉아 꿀종지에 떡을 찍어 먹던 생각이 납니다. 두 번째로 그분을 뵌 것은 충청도 대청댐 물가에 있는 시골의 회남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홍승표 목사님 덕분입니다.

어느 겨울 그이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던 날, 묘소 앞에서 하관을 지켜보며 뜨거운 육개장을 먹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이면 이현주 목사님이 둥근 빵모자를 쓰고 다니시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분의 날카로운 눈매는 항시 미소를 짓는 성품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고, 늘 자분자분 이야기를 건네시는 바람에 언제나 편안했습니다. 내가 무슨 사고를 쳐도 다 받아주실 것 같았습니다. 헨리 나웬(Henri Nouwen, 1932-1996)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묵상한 <돌아온 아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루카 15,11~32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으며 제일 먼저 자신을 탕자라고 생각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내 안에 큰아들의 모습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서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허물을 묻지 않고, 경직된 큰아들의 마음을 만져주고, 나 없이 나를 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사랑과 만나야 우리가 구원될 줄 아는 까닭입니다. 그 손길을 이현주 목사님에게서 보았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길을 가는 길 위의 사람

그분과 맞잡은 손길이 지금도 이어지니 만남이 뜸해도 온기는 여전합니다. 그당시 저는 무주에 귀농해 산골에 살고 있었는데,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영어로 지은 두 권의 책인데,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서적이었습니다. 영어에 젬병이라 당혹해하는데, 이런 쪽지가 붙었더군요. “미국서 내게 이 책이 왔는데, 자네에게 더 요긴할 듯하여 보낸다네.”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필요에 세심하게 응답하시는 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서울에서 ‘가난한’ 언론사 일을 할 때인데, 그분께 특강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전철 역까지 배웅해 드리면서 개찰구 앞에서 강사료가 든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봉투를 받아든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대뜸 봉투를 들고 돈을 꺼내더니 2~3만 원을 뽑아들고 “이 정도면 차비는 충분하네. 나머진 다시 넣어두게” 하시곤 개찰구로 빠져 나가시더군요. 초대한 이의 성의를 받아주시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이 몸짓을 보고 ‘과연 이현주 목사님이구나’ 하였답니다.

2008년에 이분을 뵈러 충주에 있는 댁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대청마루 벽에는 장일순 선생님이 써주셨다는 글씨가 걸려 있었습니다. ‘만물일화(萬物一華)’. “하늘이 내인 것이 다 한송이 꽃”이라는 뜻입니다. 지천으로 들판에 피어난 꽃들이 다 거룩한 그분 얼굴이라던 무위당 선생님의 말씀이 응축되어 있는 말이지요. 목사 안수를 받은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혈기방장하던 시절이었는데, 글씨 끄트머리에 장일순 선생님은 ‘도인(道人) 이현주’에게 준다고 썼더랍니다. 이유를 물은 즉, 장 선생님은 “자네는 길을 가는 사람 아닌가?” 하셨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길을 가는 길 위의 사람, 도인(道人)이라는 겁니다. 그때 확 깨우친 게 있었다는데, 1982년, 38살에 이현주 목사님이 쓰신 책이 <사람의 길, 예수의 길>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그후로 광화문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거리에서 무시로 예수님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그분은 언제 보아도 시무룩하고 슬프고 고뇌에 찬 얼굴이다. 그분을 만날 때마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눈물을 감추려고 하늘을 본다. 요새는 가을이다, 하늘이 너무 맑다”고 썼습니다. 제가 충주를 떠나올 때 목사님이 제게 선물로 내민 책이 <예수에게 도를 묻다>(이현주, 삼인, 2005)였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초등학교 시절에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을 잊지 않습니다. “사람이 흰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말을 앞세우지 마라.” 이를 두고 목사님은 “돌아보면 한평생 내 말(글)이 내 삶을 앞질렀다”고 하는데, 고맙게도 하늘은 내 말을 내 삶에 여러 가닥 줄로 매어놓아서, 때로 끊어진 줄도 있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내 삶이 내 말(글)에 이끌리는 수레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글과 말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 역시 이 분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게 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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