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임계점,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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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임계점,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
  • 최태선
  • 승인 2024.05.2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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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람들은 내가 쓰는 글의 내용을 너무 기준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다. 임계점은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이 지점을 통과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물의 경우를 생각하면 물의 임계점은 100도 혹은 0도다.

임계점의 다른 의미도 있다. 함수의 미분계수가 0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점을 함수의 임계점이라고 한다. 이때 임계점은 수렴할 수 있지만 접할 수 없다.

나는 복음을 임계점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위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중요하다. 복음의 임계점은 돈과 연관이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반대가 맘몬(돈)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돈으로부터 떠나야 인간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 모든 소유를 버려야 이후에 다시 생기는 소유를 나누는 사람이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예수님은 신명기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어도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은 반드시 빵을 먹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렇게 먹지 않으면 죽는 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물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대로 사는 일은 빵을 먹는 일과 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빵은 돈과 연관이 있다. 돈이 있어야 빵을 사먹을 수 있다. 하느님은 그것을 모르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오히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시다. 그래서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리셨고, 물을 터뜨려주셨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활 후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침을 마련해주셨다. 그들이 먹어야 하는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아셨다. 그리고 당신의 양을 베드로에게 위임하시면서도 양들을 먹이라는 부탁을 하셨다.

사람은 먹어야 한다. 하지만 먹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식을 너무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복음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순서다.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우선하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너무 쉬워서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것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

에스더가 한 이 말은 예수의 제자들의 믿음의 임계점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실제로 기꺼이 죽을 수 없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맛볼 수 없다.

나는 파산을 통해 그것을 경험했다. 유무상통하는 교회를 꿈꾸다 나는 모든 재산을 잃고 파산했다. 그 결과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우리 시대를 신용불량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신용불량자가 되어보아야 알 수 있다. 그 비참함은 신용불량자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내겐 그것이 신앙의 임계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내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돈 없이 사는 삶은 긴장의 연속이고 불안의 연속이다. 그런 속에서 긴장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에스더처럼 기꺼이 죽을 각오를 하고, 그 각오대로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수없이 죽음에의 유혹을 지나면서 마침내 그럴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게 닥친 극한 가난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은혜 중의 은혜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극한 가난 속에서 더해주시는 이 모든 것, 다시 말해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경험했다. 나는 이것이 내 믿음의 임계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임계점으로서 내가 접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나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한계 역시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죽비처럼 내게 작동한다. 나는 결코 완전함을 추구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욕망에 노출되지만 그것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오히려 욕망을 극복해나간다. 나의 한계를 봄으로써 나는 경성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해 매순간을 감사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는 아내는 내게 내 모순을 지적한다. 나는 그런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 아내는 가까이서 그런 파수꾼의 역할을 해줌으로써 나의 믿음의 길에 채찍질이 되어준다. 물론 아프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러나 아픔과 불편함이야말로 나의 자아를 부풀지 않게 해주는 특효약이다. 그래서 아내가 없는 신부님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시기가 여간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서를 읽어보면 그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다. 초기교회의 기사를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분부하심에 따라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위대한 신앙이었던 바르나바와 바울도 서로 다투었다. 자신의 뜻을 꺾지 못하고 갈라서야 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던 초기교회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이 성령을 속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각종 은사의 전시장과도 같았던 코린도교회 역시 문제투성이였다.

그렇다. 제자들과 교회는 한 번도 완벽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말씀은 퍼져나갔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손길이 나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도 지켜주심을 내 지난 과거를 통해 보여주셨다. 내가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그 손길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끌던 교회의 예배도 기꺼이 멈출 수 있었고, 오늘날 교회를 향해서도 무너져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할 수 있다. 교회가 우상이 되면 결코 안 된다. 교회가 우상이 되면 임계점이 무시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야 하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무시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복음은 당연히 그런 사람들을 통해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인 사람들이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임계점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리가 면벌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식이 말씀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믿기 때문이다. 맘몬(돈)의 아우라가 거대해지면 거대해질수록(세상이 어두워질수록)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지금도 하느님은 남은 자들로 하여금 임계점을 지나게 하셔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

믿는 자들이여 임계점을 확인하라. 그대들은 신앙의 임계점을 지났는가? 주님은 오늘도 추수할 일꾼을 찾으신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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