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월에 다시 조 신부, 그대에게 편지를 띄워요. 지난 엽서에 “물망초”를 “구절초”로 잘못 올렸기 때문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다시 띄웁니다. 사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이즈음엔 이놈이 사는 곳엔 아침이슬이 풀잎이며 나뭇잎마다 맺혀있어서 성당 가는 길이나 순교자 묘소 가는 길엔 몇 번씩이나 발목을 털지요. 그러다가 햇살이 지상을 내리 비치는 시간이면, 불현 듯이 내 곁을 떠나고, 또 지상의 어느 곳에도 영롱한 빛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사라져버리는 것이 또한 아침이슬이지요.
조 신부님,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아침이슬을 닮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아침에 풀잎이나 나무 끝에 매달려서 잠시 영롱한 빛을 내뿜다가, 물론 그 빛마저 햇살이 힘을 보태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햇살이 조금만 더 강렬해지면 아침이슬은 금방 사라져버리고 그 영롱한 빛마저 속절없이 사그라져버리지요. 우리네 인생이 이같이 아침이슬을 닮았다면, 악착같이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네요.
지금 한국사회는 “악착같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각자도생-ism”이 심각하지요. 아침이슬은 비록 따가운 햇살에 사라버릴지라도 그로 인해 많은 군생들에게 “생수”의 역할로서 충실히 봉사하고 떠나는데, 이 시대 사람들의 “각자도생” 끝에는 허무, 갈등, 긴장, 야속, 적대감, 불평등, 불의, 사기, 조작, 오만, 인색, 불화, 욕심, 욕망 등등의 단어만이 팽배해지도록 남게 되지요.
아침이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또한 이 시대의 우리들인지도 모르겠네요. 지도자들은 크나 작으나 자기 자리에서 제왕적 자세로 군림하고, 시인이나 문필가는 미사여구만을 나열하는 글쟁이에 다름 아니고, 언론은 여론을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호도하며, 지식인이나 사상가들을 세치 혀만 놀리고 있고, 그러다보니, 아마도 미국의 음유가수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 신부님, 사실 아침이슬이 비록 풀잎 끝에 맺혀서 잠시 빛나다가 사라져버릴지라도, 그들에게는 욕심이나 욕망이 따로 간직하고 있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100년도 살지 못하면서 1000년의 계획을 세우지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항간에서는 지금 이 나라 이 사회를 두고 “이게 나라냐?”고 합니다. 사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은 나라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이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사명을 다하는지 모를 정도로 “혼용무도”한 때가 아닐까 싶네요.
조 신부님, 문득 지난 엽서에 잘못 올린 사진 한 장 때문에 또 쓸데없는 말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어요. 그렇지만 우리 단 일각을 살더라도, 아침이슬처럼 생애 단 한번 반짝거리는 움직임을 가지더라도 그저 후회 없는,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는 군생 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네요. 아침저녁으로 날씨변화의 폭이 큽니다. 우리가 다시 볼 때까지, 만나서 쇠주 한 잔 기울일 때까지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신대원 신부
천주교 안동교구 태화동성당 주임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