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생각하다, 심상태 신부와 강남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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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생각하다, 심상태 신부와 강남순 교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9.0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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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예수는 ‘초월적 구원’에 대해서 그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가 말한 ‘신의 나라’는 ‘주기도문’에 나온 바대로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다. 예수는 환대, 사랑, 책임, 용서, 생명, 정의, 연민 등의 가치를 삶과 메시지 속에 담아낸 존재이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언제나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지, ‘무엇을 얻는가’가 아니다. 예수를 ‘철학자’로 호명하는 것은, 지난 2천여 년 역사에서 고착시키고 왜곡시킨 기독교 교리에서의 예수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가 제시한 ‘길’을 따르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찾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강남순)

예수가 가르친 것은 ‘종교’가 아니라 ‘함께 잘 살아감’이라고 말하는 강남순 선생님의 <철학자 예수>(행성B, 2024)를 진작에 구입해 두었지만, 다급한 다른 일에 밀려 책상 한쪽에 밀어두고 있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고, 빗줄기가 가라앉힌 소란에서 벗어나 이 책을 차분히 읽어볼 참입니다. 예수란 분을 신학적으로 공부한 지 햇수로는 40년 가까이 됩니다만, 예수란 분은 아무리 공부해도 매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줍니다.

대학에서 역사학과 종교학을 맛보았지만, 이런 공부가 실천적인 힘으로 작동한 것은 ‘청년신학동지회’를 하면서입니다. 젊은 그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상처 많은 교회라는 증기선을 고쳐가면서 바다로 나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회복음화와 교회쇄신’을 위해 헌신하던 천주교사회운동이라는 자장 안에서 놀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일을 하려고 했을 때, 반드시 거쳐야 했던 것이 ‘신학언어’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은 교회언어이고, 복음적 우위를 다투는 게임의 규칙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 유행한 말이 ‘신학함’(doing theology)이었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사실상 세상의 모든 신학은 상황신학이고, 삶의 현장을 떠나면 ‘살아있는 신학’이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짧은 공장생활과 노동사목 활동가로, 연구소와 잡지사에서 일하고, 교회단체를 옮겨다니다가 1999년 귀농하게 된 이유도 그러합니다. 탈농하고서 십 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언론활동을 하다가 이윽고 닿은 곳이 가톨릭일꾼운동입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 그리고 심상태 신부

베네딕도 성인은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들에게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라’ 했습니다. 이를 두고 이연학 신부님은 “공부로 기도와 노동의 중심을 잡으라”고 읽었습니다. 자칫하면 내 기도가 내 욕망의 배설구가 되고, 자칫하면 내 노동이 내 욕망의 성취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내 욕망을 하느님이 바라시는 사명이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공부, 예수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 때마다 그분은 나날이 젊어지시고, 매일 새삼 새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공부에 지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 집 ‘아름다운 모서리’에는 십자가, 그리고 양옆에 두 분의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 1909-1943)와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입니다. 처음에 대학원 졸업논문으로 쓰려고 했던 분이 “중력을 벗어나 은총으로” 다가서려 했던 시몬 베유였고, 종국에 쓰게 된 논문은 도로시 데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두 분 모두 실천적인 신비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몬 베유는 생애의 끝자락까지 전쟁으로 고통받는 다른 이들처럼 고난을 받아안고 요절했고, 도로시 데이는 75살의 나이에도 농장노동자연합 시위에 가담하여 투옥되었습니다. 이런 분들의 삶은 지금 내게 주어진 행복에 머물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도전이 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1973년 노트르담 대학교는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레테르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의 또 다른 공통점은 활동을 하면서도 힘껏 배우고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오롯한 마음으로 공부했던 대학원 시절에 만난 인상적인 두 분의 스승도 있습니다. 정양모 신부님과 길희성 교수, 김승혜 수녀님은 대학시절에 교수-학생으로 만나 종교와 신학의 바탕을 놓아주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심상태 신부님과 강남순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만나 가늘고 긴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심상태 신부님은 카를 라너(Karl Rahner, 1904-1984)를 한국교회에 소개하신 분이고, 평생 교직에 머물고 계셨지만 ‘희망의 집’ 등을 통해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을 돌보려 애쓰셨던 분이지요. 그분은 대학원에서 만난 그 인연 하나로 1999년 제가 귀농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제가 하는 일들을 후원하고 계십니다. 매달 꼬박꼬박 그 돈을 받을 때마다 “밥은 먹고 사는지요?” 하고 천천히 겸손하게 묻고 계시는 그분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제가 하는 일을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나를 내 삶의 저자가 되게 하신 강남순 선생

대학원에서 에코페미니즘을 가르쳐 주었던 분이 강남순 선생님입니다. 여기서 굳이 ‘교수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에게서 ‘지식’만을 전수받은 게 아닌 까닭입니다. 공부하는 방식과 태도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라이프 저널’(life journal)을 과제로 내주시고 강조했던 거지요. 매일 매일 오늘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장면, 뉴스, 영화, 책, 사람을 매개로 무조건 끄적여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논리적인 서술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단 한 줄이라도 적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죠. 세상을 읽고, ‘자기’라는 필터를 통해 드러난 세상을 쓰라는 거였죠. 그러자면, 내게 다가오는 모든 사건과 사물을 민감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그렇게 바라보는 나도 응시해야 합니다. 당시 선생님께 ‘라이프 저널’로 과제물로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제게는 페이스북에 이따금 올리는 글이 ‘라이프 저널’인 셈입니다. 강남순 선생님 역시 요즘은 페이스북을 통해 ‘라이프 저널’을 쓰고 계신 듯합니다. 이번 여름에 한국에 오셨다가 시카고에서 열리는 국제 컨퍼런스에 가셨을 때도 어김없이 ‘라이프 저널’을 남기셨습니다.

“공항도 너무나 춥고, 비행기도 추워서 온 몸이 마치 냉동고에 하루 종일 있다가 온 것 같은데, 호텔방에 들어오니 방 역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놓아서 추웠다. 세계 기후 위기를 말하면서 이렇게 가는 곳마다 지나치게 춥게 만드는 미국의 에너지 사용에 대한 한탄을 하면서, 간신히 잠자리에 들었다.”

“12층에 있는 나의 방에서 시카고 대학교 캠퍼스가 창에 가득하다. ... 어제 밤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호텔의 레스토랑 이름이 “Truth be told”라는 것, 방문 앞에 ‘청소하지 말라’는 표지로 걸어놓는 것도 흔히 “방해하지 마시오(Do not Disturb)”가 아니라, “읽고, 휴식하고, 성찰하기(Read, Rest, Reflect)”라고 한 것, 그리고 방 호수를 적은 곳에 ‘안경’ 표지가 있다는 것이 새롭게 보였다. 매우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러한 것을 디자인 한 사람은 이 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의 의미를 곳곳에서 나타나도록 한 것 같아서 미소짓게 된다.”

강남순 선생님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adie Said)의 말을 인용하며 “나는 나의 글쓰기에서 고향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글쓰기를 통해 “홀로, 또는 다른 얼굴들과 함께” 인생을 축제로 만드는 “나의 삶의 저자 (author of my life)”가 되어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길을 따라 걷고, 그래서 “‘나’라는 한 권의 책”을 잘 쓰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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