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카렌을 만났다. 카렌은 70세 가까워 보이는 마돈나하우스의 스탭.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계기가 있었다. 여느 날처럼 다이닝 룸에서 여섯 명씩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데 그가 물었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지금 어떤 상황인가요?”
멀고 먼 캐나다의 가톨릭 영성공동체에서 노인 스탭이 이런 질문을 하다니. 신선했다. 알고 보니 그는 1960년대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흑인 인권운동과 전쟁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수녀학교 교장 출신. 32년 전 이곳에 합류하여 줄곧 마돈나하우스의 헌책방을 담당해왔다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인연도 특별했다. 내가 토론토에서 마돈나하우스까지 5시간 버스 타고 올 때 건너편 옆자리에 타고 있던 할머니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가 함께 내렸고, 그때 비로소 마돈나하우스의 스탭이라는 걸 알았다.
“그날 버스 안에서 왠지 은경 당신이 마돈나하우스에 오는 게스트구나 감을 잡았어요.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말을 걸지 못했어요. 캐나다 컴버미어에서 미국 워싱턴까지 왕복 90달러짜리 할인 티켓으로 그날 2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오던 길이었거든요.”
그 나이에 돈 아끼려고 20시간이나 버스를 타다니. 놀라웠다. 무엇보다 60년대 말 사회운동에 참여하다가 마돈나하우스로 왔다는 그에게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대화를 청했지만 그는 회의 참석이나 노래 연습 때문에 일정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일요일 오후 어렵게 둘이 만났다. 처음 마돈나하우스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렌이 마돈나하우스를 만나기까지
마돈나하우스를 알기 전에 나는 수녀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동시에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죠. 베트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어요. 당시 5주 동안의 휴가가 주어졌는데, 나를 치유할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그때 친구가 여기를 권유했어요. 마돈나하우스에 편지를 써서 나의 고통과 힘든 부분들을 털어놓았는데, 와도 좋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그때는 지금과 달리 미국에 이런 기도의 집이 많지 않아서 선택지가 얼마 없었어요. 그때 어떤 사건과 인연들이 이어졌어요. 우연하게 마돈나하우스에 다녀온 사람을 그 무렵 자꾸 만나게 되었죠.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마돈나 하우스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어요. “캐서린 도허티는 멋진 기독교인을 만든다.” 내게 처음 마돈나하우스를 소개해준 친구가 해준 이 말이 마음에 꽂혔어요.
캐서린 도허티는 고등학교 시절 내가 들었던 ‘천주교의 사회교리’ 수업에서 도로시 데이와 함께 들어본 이름이었어요. 그때 내 나이 31살이었어요. 당시 미국은 정말 끔찍한 곳이었어요. 마틴 루터 킹에 이어 케네디가 살해되고, 우리 동네는 화재에 무너지고. 그해 학생 몇 명이 죽고, 친구들 몇 명은 감옥에 가고. 나는 너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나는 어떤 목표나 계획도 없었고, 내 괴로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죠.
처음 여기 온 나를 저녁식사 시간에 ‘비’(캐서린의 애칭)의 테이블에 앉혀주었어요. ‘비’는 원래 새로운 게스트들을 맞이하는 걸 좋아했대요. 그때 옆에 앉은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내가 어떤 계기로 이곳에 왔는지 털어놓았어요. ‘비’는 내 얘기에 집중해주었어요. 다른 사람들 얘기론, 그가 대꾸할 틈이 없을 만큼 내가 말을 많이 했대요. ‘이 사람은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캐서린 도허티 추도식에서 당신도 들었죠? ‘비’에게는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거든요.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영적 상담자에게 나를 소개했어요. 나는 그 신부님에게 내 안의 혼란스러운 에너지를 풀어냈어요. 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나는 천주교 학교에 다녔고, 수녀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여기서 하느님에 관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은 거죠. ‘나는 지금까지 뭘 한 거지?’ 마치 자동차 운전하면서 기어를 바꾸듯 신기하고 어질어질했죠.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비’는 친절했지만, 신앙적으로 나를 많이 푸시했어요. 당시는 바티칸 공의회 직후라, 교회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죠. ‘비’도 고민이 깊었어요. 교회 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여러 일들 때문에 힘들어했죠. 언제나 나에게 미국의 교회에 대해 질문했어요. 당시 내 주변에도 교회 내 변화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왜”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부족했어요. ‘비’는 그 움직임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계속 압박하고 질문하면서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촉구했어요. 내가 소속되었던 교회와 커뮤니티에 대해 성찰하게 한 것이었죠. 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 자신과 함께 교회도 망가뜨리고 있었던 거죠.
카렌, 새로운 소명 선택의 여정
처음 5주일의 생활이 끝나면서 캐서린과 영적 지도자에게 이제 나는 뭘 해야 하냐고, 주님께서 사람의 소명도 바꿀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당시에 난 이미 내가 속했던 수녀회에 서원을 한 상태였어요. 그곳에서 크게 불행하지도 않았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수녀회를 떠날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마돈나하우스에 와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고, 주님도 내가 여기에 있길 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미 소속된 곳이 따로 있었어요. 신앙에서의 맹세는 정말 무거운 거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해답을 찾고자 비에게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명할까?”라고 물어봤어요. ‘비’도 쉽게 답하진 못 했어요. 결국 본인도 잘 모르겠다면서, 5년 동안 수녀생활을 한 뒤 다시 돌아와서 얘기해보자고 했죠. 영적 상담 신부님도 동의했구요. 내가 너무 많은 걸 하고 있어서 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리나 정립이 필요하다고 했죠. 여기저기 발을 걸친 사람들은 집중력이 약해 실제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거였죠. 일단 돌아가서 내 삶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달을 거라고 했어요. 살면서 겪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이 뭘 원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얘기였죠.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교장’이라는 나의 위치가 녹녹하지 않았어요. 마돈나하우스에 살면서 작은 것들에 관심을 쏟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학교에서의 나의 삶과 행동 모두가 너무 화려해 보였어요. 마돈나하우스에 머물렀던 5주 동안 내가 너무 변한 거죠. 진정으로 복음을 사는 방법을 깨달았기에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게 힘들었어요.
그 후 5년 동안 1년에 4~5일 마돈나하우스에서 지냈어요. 마돈나 하우스에 9개월 동안 머문 적도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미래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어요. 당시 우리 수도회에 책임자가 새로 왔는데, 나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어서 힘들었거든요. 그래도 꿋꿋하게 버티다가 1974년 부활절을 기념해 금, 토, 일, 월요일 나흘 동안 머물기 위해 마돈나하우스에 왔어요. 부활절이 가톨릭 신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 알죠? 그때 나는 일요일까지 아무 계시가 들리지 않으면 수녀회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돌아가기 전날인 월요일, 부슬부슬 비가 내렸어요. ‘세인트 조셉’ 근처를 산책하며 다리를 건너는 순간. 마음속에서 주님이 내 이름을 불렀어요. “프란시스코 회를 떠나도 된다. 그곳에서 너의 소명은 끝났으니 마돈나하우스로 가거라.”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었어요. 단지 거기서 이룰 것은 다 이루었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말씀이었죠. 그 순간 나에게 깊은 평화가 찾아왔어요.
곧바로 영적 상담자에게 말했더니, 그분은 ‘비’와 의논해보라 했어요. ‘비’는 ‘세인트 레이필’ 지하에서 주얼리를 정리하고 있었죠. 이제 이곳에 지원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비’가 조언했어요. “이제 당신이 있던 곳을 떠나야 해요. 그러나 여기서 적응 못하면 프란시스코회에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어요. 알고 있죠?”
다행히도 나는 비교적 쉽게 수녀원을 떠날 수 있었어요. 수녀원을 떠나기 위해서는 원래 로마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직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아 허락받기 쉽지 않았죠. 편지를 써서 떠나고 싶은 이유를 전하면 먼저 커뮤니티에서 읽어요. 다음에 워싱턴에 있는 본교에 보내 심사받고, 그걸 로마로 다시 보내야 했죠. 내 주변에서도 허락을 못 받거나 몇 달이나 심지어 1년 만에 회신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6주 만에 허락을 받았어요. 이렇게 해서는 나는 스무 살 때부터 16년 동안 진심으로 몸담았던 수녀회를 떠날 수 있었어요.
그 후 32년 동안 헌책방 지킴이로
여기까지가 카렌이 수녀원을 떠나 마돈나하우스로 자신의 성소를 바꾼 이야기다. 그의 얘기엔 내가 관심 가질 몇 가지 포인트들이 있었다.
20세부터 16년 동안 수녀로 봉직하며 수녀원학교 교장이라는 안정된 소임을 버리고 1974년 마돈나하우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카렌. 그녀의 삶엔 1960-70년대 미국 사회의 시대가 보였다.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에 투신했던 한 젊은 수녀가 치열했던 미국 사회의 진보적 운동이 쇠퇴하면서 함께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지친 영혼에게 마돈나하우스라는 곳이 나타났다. 그는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민하고 고민하여 새로운 성소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과 선택의 과정에 함께 애정을 다해 함께 했던 캐서린 도허티와 영적 상담자의 성실한 태도. 나에겐 그것이 참 귀하게 여겨졌다.
한국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새로운 선택을 했던 수많은 나의 선후배, 동료들. 그 운동의 과정에서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을 우리는 어디에 풀고 함께 대화했던가? 새로운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쳤던가? 당연히 카렌의 종교적 선택과 나와 우리들의 선택은 차원이 다른 범주다. 그럼에도 카렌이 성소를 바꾸기 위한 여정은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다. 이렇게 힘든 결정을 했던 카렌, 그에겐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처음 마돈나하우스에 왔을 때 나는 페루 등 남미에 있는 미션하우스나 급식소로 가게 되길 희망했어요. 하지만 첫 서원 이후 마돈나하우스의 헌책방을 맡아, 그때부터 32년 동안 줄곧 이 일을 했죠. 여기 오기 전엔 수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책보다 외부활동을 더 좋아했어요. 여기 헌책방을 맡아 책에 둘러싸인 삶은 재미있었어요. 보람 있고 멋진 인생이었죠.”
- 지금은 책방이 문을 닫았던데요?
“겨울시즌에는 닫아요. 처음 맡았을 때는 1년 내내 주 6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5월부터 10월까지만 영업해요.”
- 12월 27일에 떠나는데, 그 전에 책방 구경할 수 있나요?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일정을 잡아보죠.”(그러나 아쉽게도 시간을 잡지 못했다.)
- 책방에는 새 책도 있나요?
“다 기부를 통한 중고 책이죠. 책을 기부받으면 여기서 팔아도 될 책을 따로 분류하고, 책방 수익은 러시아에 있는 별관 운영비로 쓰여요.”
- 책방은 누가 이용하나요?
“마돈나하우스 사람들 외에 마을 사람들도 많이 와요. 근처 사는 교수나 학생들을 비롯해 가톨릭신자 아닌 사람도 많이 찾아와요. 종교에 대해 지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죠. 누구나 자기 내면의 세계가 있으니 하느님을 넘어 다른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요. 책 덕분에 많은 사람과 소통해요. 책은 좋은 대화를 열어주잖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근본적으로 선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면의 선함을 찾아 그걸 응원하고 지원하는 게 내 역할이죠.
누구나 인생에 불행한 순간들이 있고, 거기에 갇혀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기는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어떤 사회적 지위나 명예 신경 쓰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예요. 그 사람의 내면을 마주 보면서 문제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구요.”
32년 동안 헌책방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도움을 주어왔다는 카렌. 그의 형형한 눈빛과 단단한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 카렌과 대화할 때 내 나이 47세였지만, 1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만났던 카렌의 나이에 다가가고 있는데. 나는 그때 카렌의 그 빛나는 눈빛과 열정어린 목소리를 간직할 수 있을까?
지금 84세 나이가 되었을 카렌, 아마도 그녀는 지금 나를 만나도 여전히 그 형형한 눈빛으로 웃으며 이야기할 것이다. 카렌이 보고 싶다.
*인터뷰 녹취문 번역: 주원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 현장에 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