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밭의 붕괴, 우리들의 티타임
상태바
차밭의 붕괴, 우리들의 티타임
  • 이송희일
  • 승인 2024.09.01 2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송희일 칼럼

인도 케랄라주 와야나드 지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 구릉과 안개, 푸른 차밭이 엽서처럼 펼쳐져 있다. 지난 7월 이곳에 산사태가 났다. 지금까지 450여명이 사망했고 여전히 시신을 다 찾지 못한 채다. 케랄라주에서 발생한 역사상 가장 큰 산사태.

아마 부유한 북반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세계가 들썩였겠지만, 사건 발생지는 인도의 삼림 지역. 언제나 그렇듯 조용하다.

그나마 이를 보도하는 언론들은 대부분 재난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간단히 소급한다. 하기는 몬순의 강우량이 점점 많아져 산사태가 나기 전 이틀 동안 570mm 이상의 비가 한꺼번에 내리긴 했다. 최근에 이런 경향이 짙어져 케랄라과 서벵골 등에서 매년 크고 작은 산사태가 발생한다. 케랄라주는 인도에서 가장 많이 산사태가 일어나는 지역인데, 2018년에만 341건의 산사태가 보고됐다.

그런데 과연 기후위기 때문에, 강우량 증가라는 단일 조건 때문에 이런 참사가 확대되는 걸까? 물론 강우량 증가가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세계 산사태의 1/3 가량은 차밭에서 발생한다.' 세계 차의 30%를 생산하는 인도에서, 특히 케랄라주와 서벵골 다르질링의 차밭에서, 세계 최대 차 생산국 중 하나인 스리랑카에서, 또는 중국 산간 지역의 차밭에서, 터키의 차밭에서 산사태 발생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이유가 뭘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사태가 일어난 와야나드의 어느 백인 무덤을 우회할 필요가 있다. 1875년에 죽은 어느 영국 청년의 무덤이다. '조지 바움백, 1875년 6월 10일 사망, 향년 27세'. 그 무덤은 19세기에 이 지역을 활보하던 백인 정착민의 거의 유일한 흔적으로 사료된다.

산사태가 난 지역은 애초에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계곡이었다. 이곳에 살던 선주민들은 숲에서 식량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고 가급적 야생동물을 해치지 않는 생활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 백인들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서부터 생태적 균형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국 정착민들이 노예와 일꾼을 끌고 와 닥치는 대로 원시림을 베어내고 차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아마도 그들의 후손이었거나, 차 열풍에 이끌려 영국에서 인도를 찾아왔다 말라리아에 걸려 일찍 생을 마감한 영국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케랄라 와야나드와 서벵골 다르질링이 온통 차밭으로 변한 이유다. 스리랑카 산간 지역이 모두 차밭으로 변모한 이유다. 중국 산간이 차밭으로 변모한 이유다.

19세기에 영국에서 발명된 게 이른바 '티 타임'이다. 인도 식민지에서 추출한 '차',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부려 추출한 '설탕', 그리고 중국 식민지에서 추출한 '도자기 찻잔'. 찻잔에 담긴 따뜻한 차와 설탕, 그리고 부유한 영국인의 담소를 위해 남반구의 생태 경관이 변경되고 노동력이 갈려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공장주들이 영국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과정에서 설탕을 때려넣은 홍차는 노동자들에게 부족한 열량을 제공했다.

이것이 인도 와야나드가 차밭의 계곡으로 변한 이유다. 오랜 생태학적 균형을 붕괴시켰던 식민주의적 수탈과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이 바로 산사태 재난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울창한 원시림을 베어내고 차밭으로 변경한 순간, 미래의 재난을 잉태한 셈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인도 케랄라주의 차밭은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갔다. 1950년에서 2018년 사이 와야나드 녹지의 62%가 사라졌다. 1950년대 이전에는 와야나드 총 면적의 85%가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량으로 차를 생산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나무를 베어냈다. 그 뒤를 이어 고무농장, 커피와 카다멈 농장이 들어섰다. 계곡의 비탈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주거지를 위해 채석과 벌채가 증가했다. 농장에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지속적으로 투하했다. 당연히 토양이 침식될 수밖에 없다. 이미 항시적인 산사태 위험을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이 지역 후손들은 '차'보다 '관광'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차밭을 배경으로 힐링 여행 상품을 막 내놓고 있던 차였다.

이미 재난은 예괴된 것이었다. 케랄라주 정부 당국, 또는 생태학자들에 의해 와야나드 지역이 몇 번 조사되고 관련 보고서가 발간된 바 있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농업, 그리고 재자연화를 병행하지 않으면 점점 증가하는 강우량을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인도의 와야나드, 서벵골, 스리랑카, 중국 산간, 터키 등 전 세계 차밭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 19세기 유럽 열강들이 차를 추출하기 위해 산비탈에 위태롭게 농장을 지어놨기 때문이다. 지금의 산사태는 단지 산사태가 아니라, 식민-자본주의에 의해 변경되고 붕괴된 생태적 재난의 총체를 의미한다. 아울러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생태적 복원을 이루고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와도 같을 것이다.

와야나드 차밭은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한다. 대략 10만명으로 추산된다. 인도의 선주민인 아디바시 부족은 물론 서벵골, 아삼, 심지어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을 의지한다. 이번 와야나드 산사태에서도 많은 이주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시신이 부패하고 신원 특정이 어려워 그냥 땅속에 매장하고 있다.

1875년 조지 바움백이라는 영국 청년의 무덤. 그리고 어제오늘 인도 차밭의 이름 모를 이주노동자의 무덤들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이송희일
1999년 첫 단편영화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성소수자들의 슬픔, 10대들의 외로움과 아픔,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 등을 섬세하면서 강렬한 연출로 그려온 그는, 2006년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끌어 한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후회하지 않아>, <백야>, <야간비행>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홍세화 선생과 대담집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등을 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