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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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을 아십니까?
  • 김흥순
  • 승인 2024.05.0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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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칼럼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소파(小波) 방정환(1899~1931)은 대중에게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정도로 인식돼 왔다. 그가 왜 소년운동에 앞장서게 됐는지, 어떤 관점에서 소년운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대 방정환은 3·1운동을 계기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장래인 어린이들이라 믿었다. 1920년 방정환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떠난 동경유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배웠고, 당시 ‘얼라’, ‘어린놈’ 등의 호칭으로 불리던 어린 아동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어린이‘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1년 김기전, 이정호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1922년 4월에는 소년운동단체와 신문사 등이 모여 ‘새싹이 돋아난다‘라는 의미로 새싹이 돋아나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천도교소년회’에서 어린이날을 선포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방정환은 1923년 우리나라 최초 순수 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판매량이 10만 부에 달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같은 해 아동문예연구회 ‘색동회’창립과 동시에 ‘색동회’를 중심으로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이 진행되었는데, 당일 천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모였으며, 거리에는 무려 12만 장의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이 뿌려졌다.

노동자들에게 양보한 어린이날

5월 1일은 노동절과 겹쳤기 때문에 1927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로 어린이날 날짜를 바꾸기로 결정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1939년부터 중단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부활, 당시 5월 첫째 일요일이었던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그와 관련 있는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손병희 방정환의 장인
민족대표 33인 권병덕 천도교 도사

방정환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1899년 11월 9일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했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었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여,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만 몰두했다.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보성소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했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매우 화를 냈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했다.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1908년 불과 열 살 나이의 소학생으로서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 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했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그 후 새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 만에 선린상고를 중퇴했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아들이 공부를 계속하기 바랐으나,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1916년에는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했지만,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아는 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곧 사직했고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에서 열심히 일했다. 부친이 성실한 천도교 신자였고,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중매 결혼했다.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장인 손병희의 권유로 191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1919년에는 장인을 도와 3.1 운동에 참가했다.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다가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넣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한 때 고문을 받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적도 있는데, 당시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옥사까지 했으니 상당히 고초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이때부터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일본 경찰에게서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1919년 말에는 일본 도쿄에 유학가서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고 거기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도요대학 철학과에 다닐 때 마해송, 윤극영 등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김기전과 함께 어린이날을 만드는 등 활발한 어린이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했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다. '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왕좌와 제비, 잠자는 왕녀 등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이렇듯 외국 작품을 많이 번역했으며 본인이 써낸 소설은 더 많다. 여러가지 가명을 사용해서 수많은 작품을 써냈다. 신문과 잡지에 수필도 많이 기고했다.

1921년에는 김기전과 함께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상하관념과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 아래에서 사회적 약자들인 어린이들이 천시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제강점 치하에서 조선 사람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실제로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어린이를 한울님처럼’ 동학사상에서 비롯된 소년운동

사람들은 당연히 어린이는 어른들의 보살핌과 배려를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대체로 그렇게 아이들을 대우한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시기까지 어린이는 약한 존재,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며 흔히 천대받고 학대받는 대상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1905년 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변경)사상은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즉 인내천(人乃天)으로 축약되는 천도교의 평등사상에서는 어린이도 곧 하늘이었으며 아동애호 사상은 방정환의 독자적 작품이 아니라 동학사상의 교리를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방정환은 부친이 독실한 천도교도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본인도 자연스레 천도교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의 일원이자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이기도 했다. 방정환은 소년운동협회인 색동회를 창립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많은 동화를 짓는 작가였다. 그밖에 세계아동예술전람회 같은 예술문화운동은 물론 어린이 인권선언, 소년 지도자 대회, 어린이날 제정 등에도 앞장섰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방정환. <사랑의 선물> 머리말. 개벽사 1922년)

일본 유학 중 접한 마르크스 사상

방정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인식과 반(反)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방정환은 1920년부터 3년간 일본 동경에서 유학했으며 이때 마르크스 사상을 접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전 세계의 청년지식인들에게 마르크시즘은 큰 관심거리였다. 그래서 20대 초반의 방정환이 마르크시즘을 공부한 것은 당시로선 사실 자연스러운 세태였다.

방정환은 1921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잡지 <개벽>에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사카이 토시히코의 글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발표한 ‘은파리’와 같은 창작물에도 사회주의적 영향이 많이 드러난다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염희경. “소파 방정환과 사회주의”. <아침햇살> 2000년 봄호, 원종찬. “‘방정환’과 방정환”. ‘문학과 교육’ 2001년 여름호). 만민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천도교와 사회주의의 공통성 때문에 방정환이 사회주의사상에 호의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사상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천도교이며 사회주의에 완전히 경도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중반 무산계급 소년운동단체 오월회(五月會)가 방정환 중심의 '소년운동협회'에서 독립하는데 이것 때문에 방정환이 ‘마르크주의자들과 대립한 민족주의자’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방정환은 계급주의 아동문학가들의 작품을 잡지 ‘어린이’에 수록했다(염희경. “소파 방정환과 사회주의”. ‘아침햇살’ 2000년 봄호).

현대인들이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엔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게 되기까지 수많은 선구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어린이날을 맞아 엄혹한 시기에 혁신적 사상조류를 폭넓게 수용하고 그것을 대중적 실천으로 연결한 방정환의 삶을 새겨본다.

그는 너무 연설을 잘한 사람이었고,열성적으로 활동한 나머지 건강이 나빠졌다.

과로와 비만, 헤비 스모커였던 탓에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돼 거기에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 창간으로 인해 "개벽"의 판매 조직이 와해되면서 스트레스가 겹쳐 1931년 7월 23일 화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31세.

 

김흥순
천주교청년연합회 민주화 활동
민통련 민족학교 1기 아태 평화아카데미 1기
전 대한법률경제신문사 대표
사단법인 세계호신권법연맹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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