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40년 지기 친구 아내의 부고를 들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내 친구보다 더 친한 친구였다. 한 달 전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아들네 집에 다니러 갔는데 건강 검진 결과 척추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머리와 간에도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한국에 있던 내 친구는 서둘러 비행기 표를 구해서 떠날 예정이었는데 그 하루를 기다려주지 않고 홀연히 떠난 것이다.
내 친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홀로 한국에 남겨졌고 캐나다에 있는 아들 부부는 갑작스럽게 엄마의 죽음을 맞이했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 친구의 통곡은 죄책감과 후회로 뒤범벅이 된 절규였다. 나는 친구에게 해 줄 위로의 단어를 찾고 있었지만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이 먹먹했지만 울지도 못했다.
모든 죽음이 그에겐 세계의 종국이다
지난주에는 예정에 없던 장례미사 독서를 하게 되었는데 고인의 나이가 47세로 오랜 기간 백혈병을 앓다가 기어이 세상을 떠난 분이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결혼도 하지 못했고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라고 하니 부모님의 슬픔을 상상조차하기 힘들다. 가장 큰 슬픔이 자식을 먼저 보낸 참척(慘慽)의 슬픔이라고 했던가! 장례미사 끄트머리에 고인과 이별식을 하는데 어머니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오열하셨고 아버지는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키셨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죽음은 ‘나이순’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르신들의 죽음을 당연시하며 위로랍시고 ‘호상’이라는 말로 유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개념 없는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철학자 데리다는 "매 죽음마다 세계의 종국"이라고 했다. 어떠한 죽음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가까이 연이은 죽음을 경험한 나는 깊은 슬픔과 무너지는 마음으로 우울하고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렵다. 요즘같이 ‘죽음의 문화’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나와 관계가 있는 이들의 죽음뿐 아니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의 죽음도 경험한다. 강남순 교수는 <데리다와의 데이트>(행성B, 2022)의 부제를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썼다. 이유는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순간 애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죽음 앞에서 ‘진정한 애도’는 무엇이며 나는 어떤 애도를 하고 있고 앞으로 해야 할까?
키넌 신부, 애도와 윤리적 삶
마침 얼마전에 예수회센터에서 열린 제임스 키넌 신부의 "애도와 윤리적 삶"이라는 강의를 들었는데 그 내용과 느낀 점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제임스 키넌 신부는 2015년, 절친한 친구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지고, 동생이 26살 때 간질 발작으로 돌연사한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 죽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애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혼자 애도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애도는 ‘함께 나누는 것’ 이라고 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애도를 함께 나누는가?
키넌 신부는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애도로 강의를 시작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오순절까지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처음에는 애도하는 모습으로 시작하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내겐 이 시각이 한편으로는 의아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나는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인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승 예수를 배반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혹시 자기들도 스승과 같은 운명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숨어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스승 예수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게 되었고 그들이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었던 능력은 바로 이 애도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키넌 신부는 애도는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아봄’의 통로 자체였다고 한다. 애도를 통해서 그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상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슬픔과 애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부재’뿐만 아니라 ‘현존’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 역시 가족의 죽음이나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면 처음에는 자신을 압도하는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가족을 잃었다는 상실감, 최선을 다해 간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홀로 남겨졌다는 외로움까지 엄습해 온다. 키넌 신부는 이것을 ‘무너지는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무너지는 마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알아보기’로 넘어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말한다. 알아본다는 것은 무너지는 마음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슬픔을 거세당한 사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파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고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연대했다.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세월호, 이태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슬퍼해.” “그만 좀 잊어.”라고 하면서 유족들에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했다.
‘슬픔을 거세당하는 사회’는 인간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동물의 세계’다. 우리 인간은 슬플 때 충분히 슬퍼해야 하고 아플 때 충분히 아파해야 한다. 그래야 새롭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키넌 신부가 말하는 애도는 무너지는 마음을 감추지 말고 솔직하게 발산하는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세상을,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하라는 정직한 ‘초대’다.
키넌 신부는 동생이 떠난 몇 주 후 동료 예수회원으로부터 위로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말이 적힌 편지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으며 채우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저 견디고 버텨야 합니다. 이 말은 처음에는 매우 가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면서 남겨진 구멍이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그렇기에 그와의 연결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이 구멍을 채워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채워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참된 친교를 유지하도록 도와줍니다,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는 본회퍼 목사의 이 말이 큰 위로가 되었고 ‘슬픔의 틈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참된 친교를 유지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경험했다고 한다. 나는 슬픔의 틈새라는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틈새를 ‘기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하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애도는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것도, 슬픔을 애써 잊으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취약함을 인정하는 것
키넌 신부는 애도와 슬픔이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낸다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취약성이란 ‘무너지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죽음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도를 통해 상실을 정확히 마주하고 더 깊게 아픔에 ‘응답’하게 한다고 말한다. ‘슬픔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슬픔을 통해서’ 상실을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을 나누는 것이 애도라는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이 ‘진행성 흑색종’으로 인하여 향후 5년 생존율이 50퍼센트 확률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12개월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겪은 후 회복과정에서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에 감사하고, 나보다 더 위태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자신의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모호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이 말이 솔직히 믿기지 않았고 놀라웠다. 왜냐하면 나는 2019년, 대상포진을 심하게 앓고 난 뒤부터 작은 통증이라도 느껴지면 불안해지고 예민해진다. 그래서 곧바로 병원을 찾는다. 대상포진 트라우마가 ‘건강 염려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위중한 병이 찾아왔을 때 키넌 신부와 같은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내게 닥친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아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수록 내 고통도 더 잘 견딜 수 있다고 하니 내 소원을 이룰 ‘방법’을 찾은듯하다.
애도의 대상을 지워버린다면
지금 우리의 삶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는 애도나 상실을 긍정적으로 다루지 않고 ‘극복’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문제로 여기는 왜곡된 시선이다. 또한 우리 사회 안에는 슬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죽음도 있고 그냥 ‘잊혀버리는’ 죽음도 있다. 애도조차 ‘위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애도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는 애도의 대상에서 밀려나 있는 것이다.
키넌 신부는 4년 전, 백주대낮에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 의해서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무심히 지나갔다고 한다. 이처럼 죽거나 말거나 관심을 두지 않고 '슬픔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들이 우리 사회 안에도 무수히 존재한다. 얼마 전 아리셀 리튬 전지 공장 화재로 죽은 이주민 노동자들, 코로나시기에 백신이 있어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공급받지 못해서 죽은 이들. 아무런 죄도 없이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아이들과 여성들. 애도는 개인적으로 의식적으로 슬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가 괄호 쳐서 바깥으로 밀어낸 사람들도 굉장히 중요한 애도의 대상이다. 이런 이들을 다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애도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매튜 셰퍼드는 젊은 백인 '성소수자'였는데 처참하게 두들겨 맞아서 버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성소수자 공동체에서는 보여주기로 했단다.(키넌 신부는 ‘show’라고 표현했다)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성소수자로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들의 삶도 중요하고 ‘애도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애도를 한다는 것은 ‘누가’ 중요한가를 알려준다. 애도를 통해서 누가 얼마나 기억할 만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애도는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우리가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배제한 이들’을 다시금 우리의 삶 안에 애도의 대상으로 넣는 중요한 행위라고 말한다.
타자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
강의 끝에 한 여학생이 “나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던 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식으로 애도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는 그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라고 했다. 개입(interrupt)이 무엇일까? 코로나 때 백만 명의 흑인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서 행진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것이 하나의 개입이다. 그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 우리가 백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흑인들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 이것은 내 삶 전체에 대한 단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들이 혐오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고 애도의 대상이라는 인식만이 참된 애도를 가능케 한다.
결국 애도는 인간을, 생명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타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가에 따라서 타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가까운 친구의 죽음부터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느꼈던 죽음까지 그 어떤 죽음도 애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애도는 슬퍼하거나 기억하는 것을 넘어 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이 이루려던 ‘삶의 책임성’을 어깨에 지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데리다의 통찰을 떠올려본다.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