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최고 권력자가 장난치듯 권력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가 탄핵 된지 곧 4개월이 다가온다. 그는 비상계엄이 야당을 향한 위협용 ‘계몽령’었다고 말하며, 심지어 자신의 불법적인 비상계엄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파렴치한 사람을 지지하기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여 ‘탄핵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언론도 공정보도를 이유로 이런 비열한 정치적 집회를 불법적인 비상계엄에 반대하는 주장과 대등하게 보도하고 있다. 그래서 불법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법적 판결이 마치 정치적으로 다툼이 필요한 것처럼 분위기를 끌어가게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정치적 흥정거리로 삼는 것은 명백하게 비열한 행위이다. 그러나 ‘정의’의 문제는 정치적 흥정거리가 될 수 없다. 공정은 중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고통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오히려 정의라는 관점에서 모든 행위의 잘잘못을 따져야한다.
예수의 출생 기원은 하느님이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예언서에서 말하는 물리적인 출생지를 근거로 거부한다. 예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과 구조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잘못된 인식을 정당화키며 예수를 거부하고 단죄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7,24)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본질을 놓치면 안 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