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국 집회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민주노총'이라는 말이 나오면 2030 여성들이 열렬히 환호를 보낸다는 점이다. 어제 남태령에서도 사회자가 민주노총을 발화할 때마다 어김없이 환호성이 터진다. 확연히 낯선 풍경이다.
일단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라는 선언의 힘을 직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화문이 되었든 어디가 되었든, 민주노총이 물리력과 상징성으로 경찰력 사이로 길을 내는 걸 보면서 얻게 된 신뢰가 클 것이다. 또 민주노총 깃발이 있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은 측면도 작용할 터다. 트위터에서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와 관련된 영상은 하나의 밈이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집회의 시작과 끝을 함께 여닫으며 형성된 끈끈한 동지애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먼저 집회를 여는 것도 민주노총과 2030 여성들이고, 가장 늦게 마무리하는 것도 두 집단이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형성된 동지애와 결속력일 것이다.
남태령을 통해 전농과 농민들에게 뜨겁게 연대했듯, 여러 광장에서 민주노총에 보내는 신뢰는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어쨌든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농민 하대와 노동 혐오로 점철되었던 지난 시기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으니까.
다시금, 광장이 학교이자 상호학습의 장이라는 걸 깨닫는다. 광장의 에너지가 휘발성이 강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는 광장에서 조금은 달라진, 때로는 보다 새로워진 주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2030으로부터 에너지와 새로운 자극을 받고 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 트라우마와 싸움으로 축적된 경험들, 강남역 사건에서 페미니즘 리부트와 백래시로 점철되었던 최근의 사회정치적 변화를 경유하며 형성된 2030 여성들의 열린 주체성과 기민한 감각이 주요한 배경이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편성으로의 수렴이다. 같은 약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열어주려는 보편의 감각. 바로 그것이 이 시국에 등장한 응원봉의 특이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제-어제의 열기가 좀체로 가시지 않는다. 이러한 연대와 신뢰 속에서 농촌, 노동, 여러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머금은 어제. 트랙터와 응원봉의 역사적 조합을 목도한 하루였다.
광장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열망도 경계해야겠지만, '죽 쒀서 개주는 게 싫다' 류의 냉소도 피해야 할 것이다. 냉소는 과거를 거의 완벽하게 동일하게 생산한다는 점에서 퇴행의 감정이다. 모든 사건이 영원회귀처럼 반복되더라도, 조금의 차이와 조금의 다른 궤적으로 반복된다. 그 차이를 포착하지 못하는 냉소가 그래서 가장 퇴행적이다.
게다가 실상 2008년 명박산성, 2016년 촛불, 2024년 응원봉은 역사의 단순 반복이 아니다. 우리는 조금씩 변해왔고 또 조금씩 다르게 변주하며 반복하고 있다
2016년 '나중에'로 가차없이 밀려났던 농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들이 2024년 '가장 먼저' 달려와 광장을 펼쳐낸 남태령이 그 다름을 정확히 예시한다. 모든 것은 다르게 귀환한다.
윤석열 세계, 괴물 윤석열을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했던 그 병폐적 세계는 단순히 윤석열 개인 하나 제거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이 2016 촛불의 가장 강렬한 교훈이다. 그리고 그것이 탄핵 너머를 응시하며,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요구와 욕망, 더 많은 말들을 광장에 쏟아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송희일
1999년 첫 단편영화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성소수자들의 슬픔, 10대들의 외로움과 아픔,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 등을 섬세하면서 강렬한 연출로 그려온 그는, 2006년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끌어 한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후회하지 않아>, <백야>, <야간비행>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홍세화 선생과 대담집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