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주일 아침 미사 후 복숭아조림, 요구르트, 메이플 시럽으로 맛있는 브런치를 즐긴 다음, 급히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오후 1시 스키 탈 준비를 하려고 창고에서 발에 맞는 스키 신발과 폴대를 찾았다. 속으론 걱정이 컸다. 몸도 부실한데 무리하는 것 아닌가? 스키는 한번도 타본 적 없는데. 하지만 캐나다에서 이 추운 겨울, 이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었다. 멕시코계 버나데트가 운전하는 차에 은수, 카타리나, 알렉스가 함께 탔다.
차 타고 5분 언덕을 올라 농장에 도착했다. 스키신발을 신고 농장 아래쪽 길을 따라 크로스컨트리를 시작했다.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눈덮인 들판과 언덕에서 스키와 폴을 이용해 이동하는 겨울 스포츠. 스키 한번 타본 적 없는 나도 탈 만했다. 뜻밖이었다. 발보다 손과 어깨에 힘을 많이 들어가는데. 엔돌핀이 뿜어져 나왔다.
깊은 숲속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
날아갈 것 같았다. 캐나다의 시골 숲속에서 스키를 타는 기분이라니. 인공스키장의 인파와 소음이 전혀 없는 깊고 고요한 산길. 가끔 이 길로 스노우 모터사이클을 타고 마을 사람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우리는 길을 비켜주며 그들을 향해 웃고 그들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눈 덮인 언덕길에서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자 20대의 알렉스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뒤쪽으로 미끄러졌다. 스키 타고 경사진 곳을 내려가기는 쉬워도 약간이라도 위쪽으로 올라가는 건 팔과 손에 힘을 많이 줘야 했다. 나도 겨우 난코스를 벗어났다.
한 시간 동안 많이 넘어지고 땀도 많이 흘렸지만 내 옷은 거의 젖지 않았다. 방수자켓과 방수바지를 입고, 장갑도 두개나 낀 덕분이었다. 은수씨는 땀에 눈에 몸이 젖어 고생을 하면서도 스키를 더 타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무리하면 내일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카타리나, 알렉스, 버나데트와 함께 농장에 들어가 따뜻한 차와 케익을 먹었다. 허겁지겁 맛있게.
일단 배를 채우니 힘이 났다. 다시 농장 언덕에 올라가 눈썰매를 탔다. 눈썰매의 매력은 위에서 미끄러지는 속도감이지만, 그보다도 멋진 것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설경이었다. 온통 눈 세상. 구름이 걷히며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살짝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시야가 탁 트이는 하늘을 눈에 담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명상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눈썰매를 타면서 아이처럼 까르르 까르르 뱃속까지 시원하게 웃었다. 이런 웃음도 기도겠지?
다시 농장에 들어와 차를 마셨다. 온몸이 노골노골. 그러나 오후 5시 저녁 미사에 맞춰가려면 옷도 갈아입어야 하니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내 장갑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농장의 남자 스탭에게 물으니, “여기 있어요” 하며 난로가를 가리켰다. 그는 내 장갑을 난로가에 말려주고 있었다.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게스트 숙소로 돌아와 나의 단벌 정장 와인색 모직 원피스로 갈아입고 저녁미사에 참석했다. 자꾸 눈이 감겼다. 그래도 밤 9시 45분까지는 메인하우스에서 버텨야 했다. 일요일은 이곳의 ‘패밀리 나이트’이니까.
카드 만들고 장식하는 밤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준비가 시작됐다. 12월 17일 월요일. 세인트 라파엘(Saint Raphael)에서 카드를 만들었다. 세인트 라파엘은 양초 만드는 사람, 목공예 하는 사람, 베틀 짜는 사람 등 각기 작은 공방이 모여 있는 건물. 재료는 주로 재활용품. 작년에 받았던 카드의 그림이나 도안을 오려 본드와 풀로 붙이거나 리본을 사용했다. 홍콩계 캐나다인 앤드류는 접었다 펼치는 예쁜 카드를 만들어 보여주었는데, 내게 그 샘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듯 단순하게 종이를 오리고 붙이며 집중하는 시간. 평온했다. 서울의 가족, 친구들을 위해 카드를 만들까 하다 마음을 바꿨다. 이곳 마돈나하우스 사람들에게 보낼 카드를 만들자.
내 옆에서는 여자 스탭이 다른 나이든 여자 스탭의 머리를 잘라주고 있었다.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 보글보글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 따뜻하고 조용한 장소에서 누군가를 위해 카드를 만드는 이 시간이 포근했다. 바깥은 코끝이 얼얼하게 추운 겨울밤이었다.
몸은 얼어도 따뜻했던 크리스마스 캐럴
12월 18일 화요일. 아침부터 즐거운 흥분으로 들썩거렸다. 저녁에 마돈나하우스 사람들이 마을을 돌며 성탄절 노래를 부르러 나가는 ‘캐럴’ 하는 날. 열흘 전 참여할 사람은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나도 선뜻 이름을 적었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오니 갈등이 생겼다. 감기 기운에 골반 근육통이 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돈나하우스의 주은씨는 “작년까지 나갔는데, 너무 추웠어요. 다시는 안 할 거예요” 하지 않나. 얼마나 추웠으면 저런 말을 하지?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오후 5시 채플 시간에 기도를 했다.
“여기 와서 40일만의 외출입니다. 바깥 공기를 맛볼 수 있고, 캐나다 일반 가정의 모습을 보는 기회입니다. 함께 크리스마스 노래하는 체험도 재미있을 것 같고, 하기로 한 걸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게 힘을 주십시오. 몸을 돌봐주세요.”
없던 힘도 만드는 게 기도의 힘인가? 미사가 끝난 후 하우스 마더 쟌에게 얘기했다. 참가하겠다고. 다이닝 홀에 붙어있는 조 편성표를 보니, 내가 속한 B조에 하우스 마더 쟌, 그리고 키에렌 신부의 이름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할 걸 상상하니 두둥실 기분 좋았다. 우리는 6-7명이 한 조가 되어 차를 탔다.
처음 순서는 큰 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 집.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거실 입구에서 노래를 불렀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고요한 밤> 대부분 익숙한 노래들. 매일 미사시간에 성가를 부르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연습 한번 안했는데도 즉석 하모니가 예술이었다. ‘똘똘이 스머프’ 같은 쟌은 소년 천사가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고. 키에렌 신부는 테너가수 급. 화음도 잘 넣고 음색은 더 없이 투명하고 맑았다.
두 번째 집에서는 네 다섯 살 아이 둘과 젊은 부부가 담요를 둘러쓰고 집안에서 우리를 내다봤다. 강아지도 함께.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그들 가족의 행복을 축복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세 번째 찾아간 집은 연립주택 형태의 아파트먼트. 혼자 혹은 두 사람 사는 집들 같았는데, 이 집 저 집 문을 두들겨도 불 꺼진 채 아무도 없는 집이 많았다. 어떤 집은 한참 벨을 누른 뒤에야 문을 열었는데, “자다 깼다”며 현관문만 살짝 열어놓고 우리의 합창을 들었다.
다행히 날씨가 조금 풀렸고 옷을 많이 껴입어 몸은 안 추웠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손과 발이 얼어 감각이 없어졌다. 나는 겉에 끼는 큰 장갑을 무심코 차에 두고 내려 더 고생을 했다. 작은 면장갑 하나만 끼고 노래를 부르려니 손이 얼음이었다. 따뜻한 집안에서 우리를 내다보며 노래를 즐기는 사람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아까 그 집처럼 좀 들어오라고 하면 안 되나?’
몸이 얼어 힘드니까 조금 전 노래할 때 행복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하.
이렇게 속으로 툴툴거리는 나를 웃음으로 구원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 집에서 카드게임을 하다 나왔다는 세 명의 할머니들. 우리에게 “춤 출 수 있는 노래를 불러 달라” 부탁하고는 우리의 노래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음정 박자 무시하고 마음대로 몸을 흔드는 귀여운 할머니들. 이런 게 전 세계 할머니들의 막춤인가? “한국이나 캐나다나 할머니들 춤은 비슷하네요.” 내 얘기에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내 몸이 점점 눈사람처럼 꽁꽁 얼어갈 때, 마지막 두 집이 나를 살려 주었다. 한 집은 우리를 집에 들여 초콜릿을 돌리고, 신부님에게는 헌금봉투를 주었다. 마돈나하우스에 보낼 선물도 쇼핑백에 담아 주었다.
마지막 집은 직접 끓여 만든 사과 차와 함께 쟁반 가득 예쁜 과자를 내왔다. 소파에 앉아 집 주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농장에서 일하는 폴이 치즈 만들 때의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가나에서 10년 일하다 돌아온 필로도 자신의 얘기를 하고. 폴 신부의 친구라는 이 집 주인은 나무 조각하는 예술가. 토론토에서 공부하는 딸, 결혼한 딸 등 가족사진으로 만든 캘린더를 보여주었다. 몸도 마음도 풀렸다. 따뜻한 시간이었다.
캐럴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불이 꺼져 있었다. 다들 먼저 와서 자고 있나? 살금살금 들어가는데 누군가 스탠드를 탁 켰다. 은수씨였다. 우리 팀이 제일 늦은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다른 팀들은 11시가 넘어 돌아왔다. 모두들 눈빛이 반짝반짝 생기가 넘쳤다. 다들 얼마나 충만한 시간이었는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화음을 만들어 누군가를 위해 노래하는 것. 특히 집집을 돌며 한 사람, 한 가족들만을 위해 그들과 눈빛을 나누며 노래하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인가.
공동체도 좋고, 기도와 하느님도 좋지만, 사람이란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즐거운 에너지를 주고받아야 생기를 얻는 거구나. 이 단순한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런데 어쩌지? 허리가 더 아파왔다.
당신의 마음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나요?
12월 19일 수요일. 은수씨가 마돈나하우스를 떠났다. 그는 내가 11월 7일 도착했을 때부터 늘 좋은 친구였다. 1년 전 은행을 그만두고 캐나다 애드몬튼으로 훌쩍 떠나 그곳 마돈나하우스 지부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사람. 이곳 컴버미어 본부에 와서 두 달 지내다 떠나려니 아쉬운 게 많다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 9일 후면 나도 여길 떠난다. 남은 시간 후회 없게 보내자.’
은수씨가 떠나고 텅 빈 듯 서운한 마음을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며 달랬다. 이 일엔 스탭과 게스트들이 모두 참여했다. 현관 입구 담당한 사람, 계단 담당한 사람, 실외 크리스마스트리에 전등을 연결하는 사람. 나는 메인하우스 다이닝 룸의 트리를 장식했다.
이곳의 작업분담 시스템은 놀랄 만큼 세분화되어 있었다. 작년에 사용하고 잘 보관해둔 방울과 반짝이들. 하나하나 포장을 벗겨내고 한쪽 테이블에 모은 다음, 스탭 한분의 지시에 따라 카미유, 산드라 그리고 나 세 사람이 방울과 반짝이를 달고. 앤 마리에게 감수도 받았다.
하우스 마더 잔은 현관에서 다이닝 룸 오르는 계단을 맡았다. 나뭇가지에 빨간 천으로 만든 장식.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소박하게 만들어도 조형적으로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그는 대단한 예술가였다. 테이블 위 천장에 매달은 ‘갈대로 만든 작은 십자가 장식’은 단순하면서도 예뻤다. 지지난 주 일요일, 세인트 라파엘에서 만드는 법을 배웠다는데. 나는 말을 못 들어 기회를 놓쳤다. 안타까웠다.
이렇듯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고, 크리스마스 캐럴 합창을 하고, 조용히 카드와 장식을 하며 분주했던 시간. 나에게 새로운 질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돈나하우스에서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마음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나요? 그 준비의 핵심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천천히 그 대답을 생각하는 나에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 현장에 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