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에 주전자 끓는 소리. 오래된 나무 바닥 삐걱거리는 소리. 스탭들 소곤거리는 소리. 아주 가끔 전화벨 울리는 소리.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 고요한 실내악 연주 같다.
여기는 마돈나하우스에서 매월 발간되는 타블로이드판 신문 <레스토레이션>(Restoration 회복) 사무실. 아침마다 그날그날 게스트들이 일할 장소가 정해지는 마돈나하우스에서 내가 가장 많이 일했던 장소다. 열 평 남짓한 하얀 목조건물에서 4-5명의 스탭이 신문을 편집하고 발송하는 곳.
눈보라를 바라보며 마음을 청소하다
나는 주로 구독 마감이 다가온 사람 등 특별 관리해야 할 사람들에게 구독연장을 요청하는 편지 작업을 도왔다. 스탬프 찍고. 풀로 봉투 붙이고. 개수 세고. 이 단순한 봉투작업을 하면서 내 눈은 테이블 위와 작은 창문을 오간다. 창밖에는 솜털 같은 눈이 빗발치고, 젊은 머레이 신부님은 몇 시간째 눈을 치우고 있다.
따뜻하고 조용한 사무실 안. 유리창 너머 바깥 눈보라를 멍 하니 바라본다. 흘러간 시간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간다. 슬로우 슬로우. 여덟 살 때 우리가 살던 삼선동 골목. 오빠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자동차의 오른쪽 깜박이가 켜지면 우회전, 왼쪽 깜박이가 켜지면 좌회전하는 게 신기해 관찰하며 놀던 날, 골목에서 눈사람 만들던 날, 그러다 장면이 훌쩍 건너뛴다.
“이제 그만 나오세요.” 수년 동안 열정을 다했던 일터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분노.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 절친, 그 서늘함. 그땐 마음이 시끄러워 잠을 설쳤지. 세상 쓰디 쓴 맛이었지. 그래. 그랬지. 다 지나갔다. 기꺼이 용서까지는 못해도 괜찮아. 흘려보내자. 저 눈보라와 함께 날려 버리자. 남아 있던 마음의 찌꺼기를 치워낸다. 홀가분하다.
침묵속의 평온함.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이 시간이 달콤하다. 눈물겹게 고맙다. 빨리 일을 끝내라는 사람도 없고, 너무 조용해서 졸기도 하고. 이것은 노동인가, 명상인가, 기도인가.
하지만 12월 4일(화) 오늘은 한숨 돌릴 틈이 없었다. 2008년 신년호가 인쇄소에서 사무실로 입고되었다. 연말이라 특별히 발송해야 할 신문부수가 많았다. 8천장의 후원요청서까지 넣어 스탭과 게스트 30여명이 함께 봉투작업을 했다. 신문 접는 팀, 봉투에 넣는 팀, 붙이는 팀, 봉투 세는 팀. 수십 년 이렇게 매월 신문발송을 해왔기 때문인지, 물 흐르듯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숨 가쁘게 흐른 하루. 평소엔 오후 3시 이후 30분의 휴식시간이 끝나면 다락방에서 기도를 했는데 오늘은 그럴 틈도 없었다.
친절이 영성이다 - 샌디 할머니
일을 마치고 저녁 미사 가는 길에, 샌디 할머니를 만났다. 등이 약간 구부정하지만 한겨울에도 실내에서 남방 하나, 심지어 반팔 티셔츠만 입고 지내는 나이 70의 할머니. 내가 놀라 “안 추워요?” 물으면, “나는 상체는 가볍게 입고 아래를 따뜻하게 입어” 하며 두툼한 양말을 보여주곤 했다. 언제나 웃으며 따뜻하게 말을 걸어오는 샌디를 우리 한국인 게스트들은 모두 좋아했다. 나도 나이 들면 그처럼 몸 건강하고 마음 따뜻한 노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 샌디가 오늘 특별한 친절을 베풀었다.
“은경, 내게 긴 코트가 있는데 아주 가볍고 따뜻해. 너 필요하면 줄까?”
내가 무척 추워하는 것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코트도 꽤 따뜻한 편이라 무조건 받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여줄래요?” 했는데. 일과가 모두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더니, 하우스 마더가 큰 보따리 하나를 내민다. 샌디가 전해준 것이었다.
나에게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팥죽색 거위털 코트, 다른 게스트 은수씨에게는 청색 오리털 파카. 거기에 어울리는 털모자까지. 와우. 가볍고 따뜻하다.
1937년생 샌디는 1959년 마돈나하우스에서 첫 서원을 했고 줄곧 마돈나하우스의 기부물품 분류작업을 담당해왔다고 하는데. 마돈나하우스에 머무는 게스트나 수련생들을 눈여겨보다가 이렇듯 필요한 물건을 전해주는 것도 자신의 일로 생각한 건 아닐까? (이 글을 쓰며 그의 안부를 물으니 샌디는 2022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늦었지만 그의 명복을 빈다.)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 경쾌한 친절과 환대
샌디의 친절을 계기로 마돈나하우스의 노인 스탭들에게 더욱 관심이 갔다. 나이 20-30대에 마돈나하우스에 들어와 50-60년을 살아온 사람들. 일흔, 여든 살인데도 언제나 아이처럼 밝게 웃고 젊은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일하고 대화하고 경쾌하게 노는 모습은 한국은 물론 마돈나하우스에 오기 전 세 달 동안 머물렀던 몬트리올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 분들은 게스트들을 위해 뭔가 도움을 주려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내가 신부님 강의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한 대목을 찾아 책을 건네주기도 했고, 언제나 따뜻한 웃음이 함께 했다. 작지만 작은 행동이 아니었다.
밤에는 지난 주 발견했던 한국인이 두고 간 오리털 침낭, 낮에는 샌디가 준 거위털 코트. 모두 여기서 얻은 것들이다. 하루하루 여러 사람의 친절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책에서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친절이 불성이고 영성이다.” 캐서린 도허티도 말했다. “친절이 사랑이며 하느님의 마음이다.” 사랑의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친절이라는 얘기였다. 나의 영적 상담자 키에렌 신부도 친절은 마돈나하우스의 기본정신인 환대(hospitality)와 통한다고 말했다.
“마돈나하우스엔 1년에 평균 500명의 게스트들이 찾아와 1주일에서 몇 달을 지내는데, 친절과 환대는 게스트만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에요. 40년 전에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20대, 30대였죠. 하지만 마돈나하우스 스탭들의 나이가 많아지면서 우리 안에서도 환대와 돌봄의 문화가 필요해졌어요. 예컨대 과거엔 눈 덮인 길도 모두들 가뿐히 걸어 다녔어요. 눈 치울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이젠 노인들이 많아 훨씬 천천히 움직여야 하고 낙상사고에 대비해 눈도 잘 치워야죠. 그만큼 친절한 보살핌과 환대가 더 필요해졌어요.”
이렇듯 고령화가 친절과 환대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문화. 우리 사회가 배울 만한 덕목 아닐까?
성 니콜라스 축일을 위해 생강과자 만들기
12월 5일(수) 일기가 짧아진다. 일상이 단조로운 만큼 하루하루 시간이 빨리 흐르고, 여기에 적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수요일 오전 탐 신부님의 강의가 있는 시간. 남녀 게스트들이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는다. 나에겐 마치 안 들리는 라디오를 켜놓은 것 같다. 내가 관심 있거나 공감 가는 얘기는 들린다. 오늘처럼 신앙적인 얘기와 추상적인 얘기가 계속될 때는 주의를 집중하기가 어렵다. 옥스퍼드 영영사전을 펴놓고, 가장 많이 반복되는 종교 언어들을 찾아본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식사 전까지 각자의 영적 독서시간. 나는 니콜라스 성인(Saint Nicolas)에 관한 책을 읽었다. 어제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 수련생 랠프는 니콜라스 성인에 대해 말해주었고, 내가 잘 모르다고 하자 이 책을 주었다. 니콜라스 성인은 3-4세기경 동로마 제국(현재 튀르키에 지역)의 성직자. 그 덴마크 버전이 전 세계로 퍼져 현대의 산타클로스가 되었다고 한다.
내일 성 니콜라스 축일을 위해 저녁 식사 후에는 남녀 게스트, 수련생, 스탭들이 생강 과자를 만들었다. 생강 밀가루 반죽으로 가로 15센티, 세로 25센티 크기의 네모 판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성 니콜라스 모습의 ‘본’을 대고 과자 형태를 빚었다. 그 위에 빨간색, 흰색, 노란색, 하늘색, 초록색 과자가루와 건포도 등을 이용해 수염이 긴 성 니콜라스가 성의를 입고 지팡이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한껏 솜씨를 발휘해 한 시간 동안 한 개의 성 니콜라스 과자를 만드는데. 미술시간 찰흙 놀이가 생각났다. 마치 예술가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언제 이런 걸 해봤더라?
특히 하우스 마더 쟌, 그리고 20살 남자 게스트 H가 만든 과자는 ‘예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You are good artist"를 연발했다. 나도 공들여 만들었지만 엉성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었던 시간.
이 이벤트가 끝나고 나서야, 2주일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뿌스띠니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겨울 밤. 여자 게스트 숙소 바로 옆에 자리한 뿌스띠니아. 하지만 그 심리적인 거리감은 절대적이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혼자 멀고 먼 여행을 가는 것 같다. 그래선지 “뿌스띠니아에서 혼자 24시간 지내는 게 무서워서 엄두를 못낸다”, “뭐 해야 할지 몰라 두 시간 만에 나왔다”는 한국인 게스트들도 보았다. 하지만 사막의 영성을 경험하는 뿌스띠니아는 나에게 침묵과 기도, 휴식의 장소다.
두 번째 뿌스띠니아
12월 6일(목) 뿌스띠니아에서 맞이한 새벽. 침대위에 숄을 깔았지만 영하 17도의 추위. 침대는 차갑고 으슬으슬했다. 샌디 할머니가 준 코트를 이불위에 덮었다. 가볍고 따뜻했다. 거위 털의 위력이 대단했다.
아침 8시쯤 일어났다. 게스트 숙소에서는 매일 6시50분에 알람이 울리고 8시까지 채플에 가려면 늘 서둘러야 하는데. 뿌스띠니아에서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창밖에 성에가 얼어 기하학적인 문양이 화려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얼마 만에 보는 풍경인가. 어릴 적 삼선동 집 유리창이 생각났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줄 없는 하얀 백지노트가 있으면 좋겠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으니 너무 좋다. 뿌스띠니아에 올 때는 빵과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아야 한다. 배가 고프진 않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홍차 한잔을 마신다.
오전 11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오늘이 목요일이니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게스트들의 자유시간.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산책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1시간 쯤 산책했다. 모르는 길을 일부러 찾아 걸었다. 아래쪽으로 걷다가 왼쪽 작은 찻길로 접어들었다. 지나는 차가 드문 곳. 1시간 동안 차 한 대 봤던가? 느슨한 오르막길. 다시 눈발이 거세졌다. 몸은 전혀 춥지 않은데 얼굴에 차가운 눈이 달라붙어 얼어붙었다.
사방에 내가 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옷 스치는 소리, 저벅저벅내 발자국 소리. 동작을 멈추고 고요의 소리를 듣는다. 걷다 서고 다시 걷다 서고. ‘내가 만드는 소리’를 친구 삼아 연주를 했다고나 할까? 숲에서 ‘다닥다닥’ 작은 소리가 들린다. 오른쪽. 딱따구리다. 조심스레 카메라를 대려하니 날아가 버린다. 다시 정적을 깨는 새소리.
얼굴이 얼어붙는 것 같아 뿌스띠니아로 돌아온다. 물통에서 물을 따라 전기포트에 끓인다. 대야에 물을 붓고 발을 담근다. 온몸에 따뜻함이 퍼진다. 뿌스띠니아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곳, 나를 만나러 오는 곳. 나는 특별히 기도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이 고요함에 나를 푹 담근다.
원래는 뿌스띠니아에서 저녁 8시까지 있다 나와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성 니콜라스 축일이라 저녁 6시에 메인하우스로 가야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두 시간 줄어드는 것 아쉽지만, 맛있는 식사도 기대되었다.
메인하우스에 들어가는데, 농장 디렉터 스콧과 마주쳤다. 내가 웃으며 “지금 뿌스띠니아에 갔다 왔다”고 했더니, 그 역시 활짝 웃으며 “Silence, Praying"이라고 답한다. 약간 뜨끔하다. 고요는 즐겼지만, 기도는 별로 안한 것 같아서.
그러나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침묵과 고요의 소리를 들으며 푹 쉬는 것을 하느님이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명상이고 기도 아닌가. 지금 이 순간이 좋으면 그것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지 않나.
노동, 명상, 기도가 하나로 통하는 마돈나하우스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현장을 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