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정성들여 옷을 차려 입었다. 처음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 게스트 숙소가 소란스럽다. 나도 청바지를 벗고 자주색 모직 원피스로 멋(?)을 냈다. 이곳의 중고품가게에서 1달러에 산 것이다. 미사 때 신을 숙녀화(역시 1달러)도 준비했다. 중,고등학교 모두 미션스쿨을 나왔지만 이렇게 차려입고 일요일을 맞이하는 게 낯설다.
메인하우스의 창밖으로 보이던 호숫가 옆 오솔길을 따라 5분 남짓 걸어가면, 과거 수녀원이었던 건물 '세인트 메리'( Saint Mary)가 있다. 일요일엔 마돈나하우스의 다른 여러 파트에서 일하는 스탭, 수련생, 게스트 등 120여 명이 모두 이곳에 모여 미사를 본다. 조금은 낡고 헐렁한 정장을 차려 입은 외국 사람들과 함께 성가를 부르고 있으니, 마치 내가 80년대 서양영화 속 미사 장면을 찍고 있는 것 같다.
미사가 끝난 후 메인하우스로 돌아와 10시 30분쯤 브런치를 먹었다. 계란찜 비슷한 요리에 색깔이 빨간 사과잼, 구운 치즈. 놀랍게도 여기선 커피를 일요일에 한번만 먹는다. 나는 커피를 아예 안 먹는 사람이라 둔감하지만 서양에서 이건 꽤 특별한 일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단순한 생활의 일면이다.
식사를 끝내고 ‘마돈나하우스 투어’에 참여했다. 처음 온 게스트들을 위해 매주 일요일 마련한 시간이다. 맨 처음 안내받은 것은 마돈나하우스의 상징인 성모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두 팔을 내미는 형상이다. 사계절 눈비를 맞으며 서 있는 이 성모상은 영성 가득한 삶에 대해 무언의 말을 걸어온다.
다음은 마돈나하우스의 설립자 캐서린 도허티가 살던 오두막. 세 평 남짓한 방 하나에 침대, 책상, 의자, 빨간 십자가가 전부다. 죽을 때까지 수도나 화장실 없는 이 오두막에서 지냈다는 캐서린 도허티. 그 단순하고 검소했던 삶이 엿보인다. 자료를 통해 그의 연보를 정리해보았다.
마돈나하우스 설립자 캐서린 도허티
1896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수녀원 학교를 다녔다. 러시아 정교회. 동방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영성적 전통을 물려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핀란드를 거쳐 영국에 도착. 영국에서 천주교신자로 개종했다.
1921년 캐나다로 이주했다.
1930년 토론토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평신도 공동체 ‘우정의 집’을 만들어 노숙자를 위해 쉼터와 식사, 신문 발행 등 활동을 했으나 실패했다.
1938년 미국 뉴욕 할렘 가에서 ‘우정의 집’을 다시 시작, 친구인 ‘가톨릭 일꾼’의 도로시 데이와 함께 운동했다. 가톨릭 영성가 토머스 머튼과도 교류했다.
1943년 아일랜드계의 미국인 신문기자 에디 도허티와 재혼했다.
1947년 토론토 동북방향 작은 마을 컴버미어에서 공동체에 대한 사랑, 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소명을 위해 마돈나하우스를 설립했다.
1955년 청빈, 정결, 순명을 서약하며 가톨릭교회의 수도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했다.
1958년 마돈나하우스는 평신도와 사제들로 구성된 수도공동체로 인가받았다.
1962년 바티칸 제2공의회를 통해 마돈나하우스는 동서양 모든 크리스천의 융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1985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20여명의 사제와 130여명의 남녀 평신도들로 구성된 마돈나하우스의 기틀을 잡았고 십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마돈나하우스 투어는 30분이면 끝난다기에 화장실도 참았는데 함께 투어에 참가한 사람들이 학구파처럼 질문을 많이 한다. 인도에서 12살에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는 젊은 여성변호사. 40대의 현직 영어교사 흑인여성 셔메인. 직업은 잘 모르겠으나 참 착해 보이는 작고 통통한 남자. 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지루한데, 마돈나하우스 투어는 무려 1시간 반이나 걸렸다.
언덕위의 농장과 푸스티니아
오후 2시에는 농장 방문. 마돈나하우스의 거의 모든 식자재를 생산하는 곳이다. 2,30대 한국 여성 게스트 두 명과 함께, 나보다 이틀 먼저 온 게스트 브라질계 마가리타의 자동차를 타고 5분 남짓 언덕길을 달렸다. 농장에 도착했다. 건물이 여러 채라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작은 목조건물의 문을 열고 나왔다. 어찌나 선하고 평화로운 얼굴인지 살아있는 성자를 만난 것 같았다. 이름은 스콧. 나이가 52세라지만 마흔도 안 돼 보였다. 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농장 곳곳을 안내했다.
젖소 짜는 곳, 치즈와 아이스크림 만드는 곳. 특히 농구장만한 크기의 농기구 창고는 탄성이 나온다. 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발 위에 신는 설피, 말안장 등 정말 없는 것이 없다, 대부분 기증받은 것들을 잘 닦고 보관해 정기적으로 가게를 연다. 1년에 한번은 열렬한 댄스파티도 한다. 농기구 창고 안에서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춘다니.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농장 바로 위 언덕을 올라가자 시야가 탁 트이며 사방이 내려다보인다. 아주 완만한 구릉 너머 멀리 자작나무 숲이 내려다보인다. 가슴이 뻥 뚫린다. 언덕 위 초원에는 통나무로 만든 오두막 ‘푸스티니아’가 있다. 하늘과 산이 펼쳐질 뿐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혼자 조용히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공간. 마돈나하우스 설립자 캐서린 도허티가 가져온 러시아정교회 전통의 장소다. 나도 곧 푸스티니아를 만나리라.
11월의 오후 3시, 어둑하고 싸늘하다. 서둘러 언덕을 내려온다. 잠시 후 저녁식사. 평일엔 흩어져 일하던 마돈나하우스의 각 부서의 사람들이 일요일엔 메인하우스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일요일 저녁은 이른바 Family Night. 그런 만큼 음식도 풍요롭다. 사과 시럽으로 만든 디저트가 특히 맛있다.
마돈나하우스의 한국인 스탭
일요일이니 식사 후에는 일찍 숙소에서 쉬겠지 했는데, 아니다. Famliy Night에는 9시30분까지 메인하우스에서 각자 자유시간을 보내다가 숙소로 가야 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대화하고 노는 문화를 위한 규칙인 듯하다.
이 시간에 나는 마돈나하우스 스탭 주은을 만났다. 그는 마돈나하우스의 아픈 사람들을 위한 식사를 담당한다. 30대 후반인 주은은 2003년 3월에 처음 이곳에 왔다. 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그는 무척 지쳐 있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리며 기도할 장소를 찾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마침 캐나다에서 유학하던 사촌언니를 통해 마돈나하우스를 소개받았다. 이곳에 도착해 처음 맞이한 4월 초 눈이 녹을 때, 호숫가의 햇살이 부서지듯 빛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펑펑 울었다는 사람.
그의 어머니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이곳에 있는 동안 암이 깊어진 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의 위중함을 알리지 않았다. 공동체에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위해 잠시 귀국했던 그는 마돈나하우스로 돌아와 남은 수련기간을 마쳤다. 2006년 6월엔 종신 서원을 하고 정식 스탭이 되었다.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건 처음이라는 주은. 그의 얘기를 들으며 밤이 깊어간다. 내 엄마가 돌아가신 지 6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엄마 얘기를 하려면 울컥 목이 멘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렇다.
9시 30분. 숙소로 돌아가 1층 공중전화로 폰뱅킹 처리를 하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겨우 끝내고 2층으로 올라가니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 1년 동안 게스트로 생활하다 내일 집으로 돌아간다는 20대 여성 제나(Jenna)의 송별파티. 집이 마돈나하우스에서 가까워 어릴 때부터 자주 놀러왔다고 하는데, 몇 주 후 자기 생일에 우리를 초대한다.
11시에 불을 끌 때까지 세수도 해야 하고 잠자리 준비도 해야 하고. 첫 번째 일요일은 일어나서 자는 순간까지 꽉 차고 분주한 하루였다. 한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시간이 펼쳐질까? 두근두근하다.
<다음 이야기가 격주로 이어집니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현장을 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