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역사학은 19세기 말에 이르면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인간 진보에 대한 믿음이 붕괴된 시대 인식이 원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앞서 언급한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신화와 계몽을 대립시키면서 발전한 역사학 또한 신화에 다름 아니었다는 자괴적인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슈바이쳐의 저서는 역사의 예수 연구가 과학이 아니라 신화였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슈바이쳐보다 한 세대 앞선 마틴 켈러(Martin Kähler)의 저서 《소위 ‘역사의 예수’라는 것과 역사적인 성서적 그리스도》(Der sogenann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biblische Christus, 1892)는 이러한 초기 역사의 예수 연구의 방법론적 위기를 명료하게 드러내주었다. 여기서 그는 〈마르코복음〉을 “확대된 서론이 첨가된 수난설화”라고 단언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 복음서가 예수 자신에 관한 책이 아니라 ‘예수의 수난설화’를 이야기하려는 저자의 가공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마르코복음〉을 통해 예수를 재현해내고자 했던 모든 역사적 시도가 무망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는 《세계의 독서 가능성》(Die Lesbarkeit der Welt, 1981)이라는 흥미로운 저서에서,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태동한 서양 근대주의는 ‘세계를 읽는다는 것’과 ‘책을 읽는다는 것’을 동일한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의 일상화를 동반한다고 주장한다. 인쇄술의 발전을 통해서 책이 대중화됨으로써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세계를 읽게 된다. 즉 세계는 독해하는 것, 독서 가능성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책을 읽듯이 세계를 독서한다. 나아가 세계는 책이며 책은 세계 자체다.
한데 이것은 독서 되지 않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책 밖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책 밖에서 세계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학문은 책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책을 독해하는 것, 그렇게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서양의 근대 학문체계는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켈러는 이미 19세기 말에 예수를 읽는 그 ‘책’이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수난설화를 기억하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사적 시선을 확장해서 편집해낸 것이라고. 그러니 그것은 해석된 케리그마이지 역사가 아니라고. 이후 예수 연구서는 켈러의 공식 위에서 담론을 펼쳐야 했다. 그러니까 블루멘베르크가 서양 학문의 문제점이라고 지성사적으로 비평한 바로 그 사실을 예수연구를 수행했던 켈러의 주장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구술 연구
예수에 대한 구술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시기다.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 예수연구에 활용된 것이다. 예수와 최초의 예수 전기(傳記)인 〈마르코복음〉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 ‘구술 전승’(oral tradition)을 발견하면 예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 그 구술 전승을 발견하는 방법론적 도구로 제1성서(복음서) 연구에서 활용되었던 비평방법을 예수 연구에 적용한 것이다.
양식비평이란, 그 용어가 말해주듯, 책들(복음서들) 속에 구술 양식들(forms)이 함축되어 있으니 그것을 복원하면 책보다 더 오래된 예수전승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기적이야기 양식, 비유 양식, 아포프테그마(apophthegma, 격언) 양식 등이 그것이다. 즉 예수의 이야기들이 구술단계에서 양식별로 묶여서 전승되었고 그것을 저자가 책으로 펴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양식비평의 방법론적 전제이다. 첫째로, 각 양식에 포함된 에피소드는 ‘짧다’는 것이다. 해서 이 에피소드를 짧은 이야기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음역한 ‘페리코페’(περικοπή)라고 부른다. 이는 긴 이야기는 기억될 수 없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두 번째 전제로 각 양식의 배후에는 특정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있다는 주장이다. ‘삶의 자리’는 담론의 사회종교적 맥락을 말한다. 그것을 밝혀내면 복음서보다 더 오래된 예수담론의 사회종교적 맥락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면, 이러한 구술적 모색은 대단히 과감한 실험이었으나,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연구사 전체에서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구술적 전승 단계가 가장 초기의 형태임을 인정하고, 또 양식비평적 탐색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구술조차도 ‘사실상’ 책으로 환원시켜버렸던 것이다. 매체학자인 맥루한(Herbert Marshal Mcluhan)이나 그것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가톨릭 사제 월터 옹(Walter Ong)이 주장하고 있듯이 ‘구술’은 ‘청각적’인 현상임에도 양식비평학을 활용한 연구자들은 그것을 ‘시각적’인 것처럼 독서한 것이다. 감각적 소통보다는 지성적 이해를 중심으로 구술 텍스트를 읽으려 했다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도 구술 연구를 통해 예수의 역사성에 접근하려는 모색에 참여했던 실험적 연구자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결론은 양식비평적 구술의 기초 단위였던 양식(form)도 초기의 교회의 해석의 소산이었다. 그가 인정할 수 있었던 예수의 진정한 것은 ‘그의 말’들 뿐이었다. 복음서들 속에 예수의 말들로 소개된 것들의 약간 정도. 그래서 그가 도달한 결론은 역사의 예수는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 세미나의 허풍, 불트만의 솔직함
역사가로서의 그의 솔직한 태도는, 최근 예수 연구자들의 허풍을 떠올린다면, 매우 감동적이다. 최근 북미의 예수 연구 그룹인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는 〈토마복음서〉를 포함한 다섯 개의 복음서 속의 예수의 말 가운데 단지 18%만이 예수의 진정한 말 혹은 그렇게 볼 개연성이 높은 말로 분류되었다는 자신들의 결론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노라고 떠벌린다.
놀랍게도 그들은 예수의 말 이외의 사건적 기술에 대해서는 과거 연구들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극복할만한 인식론적 진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다만 사회학적,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 등에 힘입어 맥락적 지식을 과도하게 텍스트 이해에 개입시키는 이른바 ‘컨텍스트주의’가 그들이 믿는 방법론적 성과의 가장 큰 버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불트만의 역사에 대한 회의는 솔직함이 돋보인다.
그 역시 역사학의 위기를 근대적 정체성의 위기로서 체감하지 않을 수 없는 근대인의 하나였다. 아니 서구 근대적 지식의 적자로서 그러한 서구 근대적 지식의 위기는 그에겐 심각한 존재론적 위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예수를 몰라도 신앙이 여전히 가능한지, 지극히 근대인다운 물음에 대해 물어야 했고, 그의 답은 하이데거로부터 영향받은 탈역사적 실존주의를 통해서 역사의 위기를 우회하는 길이었다.
불트만과 에드워드 카 , 역사학은 관계의 학문
불트만의 관심은 실체를 묻는 역사가 아니라 관계에 있었다. 즉 그에게 역사학은 실체에 대한 학문이지 관계에 대한 학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 세대 후에야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가 비로소 역사학을 시간적 관계의 학(“과거와 현재의 만남”)으로 다시 정의한다. ‘과거 사실을 밝혀내는 학’, 그러니까 ‘단 한 가지 사실뿐인 과거 그 자체를 밝혀내는 학’으로서의 역사학은 이미 19세기 말에 철회되었다.
그것에 대해 에드워드 카가 제시한 대안적 개념은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것, 그것에서 발생되는 의미의 학’이 역사학이다. 즉 과거는 현재를 해석하고, 현재는 과거를 재발견하는 무수히 새롭게 재해석되는 과정이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은 ‘단 한 가지 사실’이 아니라 ‘현재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수많은 의미의 가능성’을 통해 구현되는 시간의 학문인 것이다.
불트만의 성서해석학도 ‘관계의 학’이라는 점에서 훗날 역사학을 재구축한 에드워드 카와 만난다. 하지만 그는 카처럼 역사학을 복원시킬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그가 주목한 관계는 시간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시간과 탈시간’ 사이의 대화였다. 그것을 그는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기대어 ‘실존’(existence)이라고 불렀다. 즉 항구적인 실체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며, 실존은 시간과 탈시간이 서로 끊임없이 움직이다가 만나는 ‘사건적 존재’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복음서 속의 예수는 탈시간적 존재이고 독서하는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시간적 존재로서 실존적 만남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트만은 관계적 문제설정을 통해 과거 사실의 발견에 집착했던 역사학의 한계를 돌파했다. 하지만 그의 실존주의적 대안은 더 철저하게 현실 상황에 직면하지 못했다. 슐레겔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포스트근대적 문제의식을 가진 여러 근대 사상가들이 역사학을 현재와의 치열한 대면의 장으로서 해석한 것에 비해 그의 대안은 너무 안이했다. 심지어 그가 대면해야 했던 나치의 파괴성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불트만의 관계적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도 그와는 달리 현실 개입적인 관점에서 성서를 읽는 방법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에드워드 카 이후 역사학의 문제의식은 그런 우리에게 예수를 역사학적 관점으로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