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예수 밖에서, 사랑에 실패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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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예수 밖에서, 사랑에 실패한 사나이
  • 한상봉
  • 승인 2019.01.21 09: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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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14
The Taking of Christ by Caravaggio

‘유다’라는 이름은 참 위태로운 것이었습니다. 제 겨레가 ‘유다인’이고, 제 나라가 ‘유다’입니다. 유다는 거룩한 백성이면서 흙먼지와 같은 겨레였지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다지만 언제나 자긍심은 함량미달이었고, 숱하게 외세에 침략을 당하고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서도 그분의 자비를 의심하고 그 정의를 배신하였지요. 윗물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고 아랫물은 흙탕물인 채 흐려서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남아 있는 거룩한 무리라고 자칭하는 에쎄느 사람들은 이미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광야로 물러났지만, 저는 타는 목마름으로 ‘해방 유다’를 꿈꾸었지요. 그렇다고 로마와의 투쟁을 결의한 열혈당원들이 썩 마음을 잡아당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다른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대중들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 파도처럼 일으켜 세울 더 분명한 깃발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 전조(前兆)를 예수에게서 보았던 거지요.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벌써 알아듣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더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지만, 그분이야말로 노련한 어부였고, 한번 걸린 물고기는 놓치지 않을 분이었지요. 섬세하면서 단호한 품새가 내 가슴을 들끓게 하였지요.

혁명을 하자던 동료들을 떠나 그분에게 간 뒤로 그렇게 마음 편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는 기대를 낳고 마음은 초조함에 시달렸습니다. 그날이 언제일까? 그분이 깃발을 들면 나는 언제든지 앞장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곁에서 예수를 따라 다니던 우리 동료들은 참 어설프기 그지없는 무리였습니다. 호언장담을 일삼는 베드로나, 착하긴 하지만 계집아이처럼 약해빠져 보이는 요한을 보면서 마음 든든하고 진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동료가 없음이 안타까웠지요. 한 자리에 모이면 누가 상좌(上座)에 앉을 지 옥신각신 다투고, 스승에게 핀잔을 들어도 잠깐 뿐이었지요.

이 사람들과 과연 더불어 거사(擧事)를 도모할 수 있을 지 의심하면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밤마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건만 앞날이 자꾸 안개 속으로 사라져 답답한 가슴을 더 옥죄이곤 했지요. 스승은 말이 없고 제자들은 소란하고 시국은 어두웠습니다.

스승의 태도 역시 저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지요. 당신 제자가 되려면 온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오라던 분이 백성의 고혈을 빨던 자캐오에게는 유난히 관대하더군요. 그는 세관장이었고, 그가 가진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고 해도 여전히 부자였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더불어 섬길 수 없다던 분이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자로의 집에선 마리아가 값진 나르드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스승의 발을 닦아드렸는데, 그땐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더군요.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심경을 말해 보았지만, 스승은 오히려 그녀를 두둔해 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우리 무리의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므로 다른 흑심을 먹었을 것이라고 억측하지만, 애초에 우리들에겐 돈주머니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스승은 어디를 가든 여벌의 옷이나 신발, 돈주머니를 챙기는 법이 없었지요. 사람들이 주는 대로 먹고 자고 걸어서 다녔습니다. 물론 스승은 우리 동료들에게도 같은 걸 요구했지요. 하느님의 자비에 무조건 맡기고 살자는 거지요.    

문제는 제가 스스로 세운 이념에 너무 붙잡혀 있었다는 데 있었지요. 고통 받는 가난한 백성들과 이 겨레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 예수가 바로 그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었는데, 스승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같았고, 급기야 저는 차라리 바라빠를 걸고 대사제와 흥정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정치적인 폭도보다 종교적인 예수를 더 눈엣가시로 여겼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저는 스승과 좀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습니다. 동료들을 마뜩찮게 여겨서 겉돌지 않고 그네들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저는 스승을 따라다녔지만 그분을 충분히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내 생각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였다면, 그분이 나누었던 사랑 안에서 다른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혁명의 지도자에게 절망한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랑에 실패한 것입니다. 제가 팔아넘긴 스승이 빌라도에게 넘겨진 연후에야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자에게 남겨진 것은 어두운 심연뿐이었지요. 그 아가리에 목을 매면서 문득 마리아가 얼마나 스승을 사랑하였는지, 스승이 무엇으로 세상을 품었는지 알듯 했지요. 그러나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왔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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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현 2022-01-14 09:42:55
"저는 스승을 따라다녔지만 그분을 충분히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문장을 곱씹게 됩니다... 늦은 후회의 원인이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