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동지보다 필요한 친구
얼마 전 정의당 노회찬 의원을 떠나보내면서, 우리 사회가 왜 좋은 인재를 떠나 보내놓고서 후회하는지 생각해 보았어요. 우리 사회가 촛불혁명을 치르면서, 민주주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겼는데, 아직도 구체제가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엉뚱하게 한국의 양심세력이 손상을 입은 것입니다.
노회찬 의원, 그 분은 거짓말을 못해서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골백번 거짓말 하고 살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거짓말 하는 존재죠. 그분의 마음이 되어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엇보다도 노회찬 의원은 자기 동지들한테 거짓말 한 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아요. 이정미든 심상정이든 동지들에게 자신은 돈 안 받았다고 했는데, 그게 결정타였던 것 같아요. 가장 깊은 신뢰관계에 있는 동지들한테 거짓말한 것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참에 정치적 동지도 참 중요하지만, 인간적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벗도 중요하겠다 싶어요. 가톨릭신자라면 고해성사를 하고 좀 털어버릴 수 있겠는데, 이게 아니라도 뭐든지 문제가 있으면,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한 사람의 벗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정치적 동지 말고 그게 아쉬워요. 돌이켜 나한테는 그런 벗이 있는가 생각하면 나도 별로 없어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죠. 정말 시시콜콜한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해요. 그런 친구 하나 있다면, 아주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굉장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페북 하는 사람들, 자기애 중독현상
자기 잘난 맛에 살다보면 친구가 없어요. 뭐든지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 상처는 크게 아파하면서, 남의 상처를 아랑곳없죠. 이게 아마 예수님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겠죠. 예수님은 자기 상처보다 남의 상처를 더 아파했어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창자가 비틀어지는 극통을 느꼈다고 하죠. 그런 경우에 ‘자기’라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설정한 ‘자기’라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전철에서도 십중팔구 다들 이거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게임 하는 사람, 카톡 하는 사람, 페북 하는 사람 다양해요.
내 친구들도 요즘 페북 열심히 하는 사람 많아요. 하루에 몇 시간을 거기에 소모한다고 해요. 제 느낌은 그저 한 마디로 병든 사회구나, 하는 것이죠. 전부 나르시즘이죠. 페북에 한 마디 올리고 내 친구들이 무슨 소리 하는지 기다리는 겁니다. ‘좋아요’ 몇 개인지 들여다보고, 댓글이 마음에 안 들면 ‘친구삭제’하고요. 한마디로 사람들이 다 외롭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 짓 하죠. 페북 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애가 강화되는 중독현상이 생깁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술도 잘 안 먹어요. 매일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요. 새벽에 눈 뜨자마자 들여다보고.
우리나라는 뭐든지 극단으로 가는 모양입니다.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을 전부다 자폐적으로 만들어 걱정이 커요. 인간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다 ‘아상’(我相)이라는 감옥 속에 사는 것은 틀림없어요. 그렇지만 문화에 따라서 이걸 적절히 승화시켜야 해요. 소셜미디어를 잘 이용하면 촛불집회로 가는 거죠. 스마트폰으로 교신해서 사회문제에 참여하면 민주주의를 위한 참여수단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자칫하면 각자 자기한테만 사로잡혀 있게 만듭니다. 우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우습게 보지만, 다소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우리가 다 트럼프일 수 있어요. 조금만 칭찬해 주면 와! 하고, 자기를 조금만 비판하면 뒤집어지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천박한 문화입니다.
공생의 윤리 필요한 시대
자기중심적 문화가 낳은 결과 중에 하나가 ‘힐링’과 ‘위로’를 강조하는 책들이 서점에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남을 위로할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상처를 드러내놓고 말하고 위로받을 생각만 합니다. 나만큼 타인들도 고통 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안 해요. 항시 내 상처만 중요한 거죠. 우리 문화가 ‘징징대는’ 어린애 문화가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는 다 망합니다. 현실은 인간자신이 더 성숙해지지 않으면 모두 망할 수밖에 없어요. 정말 공생의 윤리를 채택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요.
여름도 가을 같다던 스웨덴이 금년 여름에 34도까지 올라갔데요. 산불이 꺼지지 않아서 폭탄을 터뜨렸답니다. 일시적으로 공기를 차단해서 화재를 진정시키는 극단적 방법입니다. 기후변화로 북극에선 얼음이 빠르게 녹고 있는데, 미국 애리조나 대학의 가이 맥퍼슨 교수는 10년, 15년 뒤엔 인류가 전멸할 것이란 이야기를 아주 태연하게 하고 있어요.
나도 이번 여름엔 에어컨을 돌렸어요. 노인이 되고나니까, 너무 더우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도무지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요. 내가 그동안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는 글을 많이 써왔는데, 자가당착이죠. 지금 같으면, 누가 “탈 원전을 할래? 에어컨 멈출래?” 선택하라면, 쉽게 답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원전은 100퍼센트 사고 나는 것 아니니까, 당장 견딜 수 없는 더위에 손을 들 것 같아요. 그래서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 가운데 원전 돌리자는 사람도 꽤 있어요.
지구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제임스 러브록 같은 분도 ‘녹색과학’을 해야 한다면서 테크놀로지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는데, 최근에 달라졌다네요. 원자력 위험성은 장기적이고 불확실한데, 기후변화는 확실한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하고, 순차적으로 탈 원전을 생각해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러브록을 많이 욕했는데, 기후변화가 피부에 실감할 정도로 자주 오니까 좀 당혹스러워요. 결국은 원칙보다도 당장 위급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게 사람의 동물적 본능이라 그런 거죠.
땅에서 살아야 인간
학자들이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게 가능한가, 싶어요. 결국 거대한 에어컨이 작동되는 별도의 인공적 환경에서 살자는 것인데, 이런 인간은 이미 인간이라 말할 수 없어요. 땅에 몸을 부대끼며 살아야 사람입니다. 요즘은 토양오염과 나쁜 기후조건을 넘어서기 위해 큰 빌딩 안에 인공농장을 지어 작물을 재배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요. 실내에서 사람에게 링거액을 주듯이 식물들에게 인공영양제 주고, 태양빛과 비슷한 조명등으로 식물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이게 앞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미래의 새로운 산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땅을 보존하는데 투자와 정성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거죠. 땅이 오염되어도 상관없다는 거죠.
지금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뭐냐?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지상에서 산다는 게 뭐냐? 하고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때입니다. 사람이란 열린 공간에서 미생물과 지렁이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전체 생명과 조화로운 삶을 생각하지 않고 단기적인 ‘이익’만 생각하는 ‘배타적인 자기애’가 문제입니다.
급진적 겸손함, 리 호이나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반 일리치와 그의 가장 친밀한 벗이었던 리 호이나키(Lee Hoinacki)입니다. 두 분도 다 가톨릭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일리치는 신부였고, 호이나키는 도미니코회 수사였죠.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라는 책을 쓴 호이나키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박사논문을 포기하고 “미국 안에서는 미국을 보기 어렵다.”며 베네수엘라에 갔던 분입니다. “평생 망명객으로 산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뿌리 없이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미국에 돌아와 박사과정을 마치고 어느 혁신적인 대학에서 교수노릇을 했지만, 결국 권위적인 학교체제와 학문에 염증을 느끼고 시골 벽지에 내려가 농사를 짓습니다.
생활비를 요청하는 딸의 편지를 받고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호이나키가 인근에 있던 대학에 취직을 했는데, 청소부로 일한 겁니다. 그중에서도 남들이 기피하는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는데, 책에서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갑자기 화장실 청소가 하고 싶더군요. 내가 스무살 때 호이나키를 알았다면, 나는 영문도 모르고 대학 영문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호이나키의 이 이야기는 ‘급진적 겸손함’이 뭔지 알려줍니다. 호이나키가 만난 사람 가운데 도로시 데이도 그런 사람이었죠.
호이나키는 <가톨릭일꾼> 편집자였던 로버트 콜스가 처음 도로시 데이를 만났을 때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가 처음 메리하우스(환대의 집)에 갔을 때 도로시 데이는 횡설수설하는 어느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콜스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틈을 내어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두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볼 일 있습니까?” 당연히 자기를 만나러 왔을 텐데, 도로시의 의식에서는 그 여인과 자신 사이에 구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겸손함의 극치’입니까? 호이나키는 청소를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여기서 무한한 희열을 느낍니다. 이 사람은 한없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려줍니다.
미국이 나를 바꾸지 않도록
리 호이나키는 가톨릭일꾼이던 헤네시가 쓴 <또 하나의 전쟁>이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매카시 선풍이 부는 냉전시대에 미국 정부는 소련을 적으로 규정하고, 안보, 국방 운운하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방공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날도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방공호로 대피했지요. 그런데 헤네시는 길을 걷다가 사이렌 소리를 듣고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경찰이 왔지만 헤네시는 방공호로 들어가길 거부했습니다. 내가 전쟁과 냉전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친구들이 “네가 그렇게 해서 무슨 효과가 있느냐?” 고 묻자, 헤네시는 대답합니다. “내가 미국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미국이 나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히 보여줄 수 있다.” 이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그들의 신앙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할, 경외할만한 무엇
환경론자일수록 여기저기에 붙여 놓곤 하는 사진이 한 장 있어요. 우주선 아폴로가 달쪽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입니다. ‘푸른 행성, 지구’라는 이 사진을 두고 이반 일리치는 ‘불경(不敬) 중의 불경’이라며 질색했습니다. 내가 일리치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일리치는 인간이란 땅바닥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우주를 개척한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보지 말아야 하는 걸 보는 것은 지구에 대한 모독이고, 불경입니다.
1950-60년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말이 유행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원자력 때문에 이제는 에너지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이젠 인류가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조봉암 선생조차 진보당 강령을 쓰면서 원자력을 찬양했을 정도니까요. 1956년 그 무렵인가 서울대에 원자력공학과 생기고, 아이젠하워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연설을 했어요. 원자력에 대한 찬탄이 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원자력의 힘으로 북극의 빙하를 녹여서 아라비아 사막에 공급하면, 사막이 초원으로 변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어떤 과학자들은 그런 수준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동양철학자였던 김범부 선생이 딱 한 마디로 조졌습니다. “북극이 빙하로 뒤덮여 있는 것은 태양계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북극과 남극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태양계의 섭리이며, 우주의 섭리이며,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물주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과학자를 믿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과학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브 호킹은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을 굉장히 걱정했던 사람인데, 그 해결책은 참 엉뚱했어요. 엘리트들을 모아 화성으로 이주하자는 것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프리먼 다이슨 같은 천체물리학자들도 지구는 얼마 안 가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고, 그러니 화성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과학 공학으로 단시간에 지구인이 살 수 있는 인위적인 환경을 화성에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학적 천재들의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으면 한심합니다. 설령 그들이 다른 행성으로 간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정신구조를 바꾸지 못하는 한, 머지 않아 그 행성도 오염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기 지구에서 오염 원인을 찾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셈이죠.
머리로 알기 전에 몸으로 아는 진실
지금이야말로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이 불경’이라는 식의 생각이 필요합니다. 불경이란 무엇인가요? 산부인과에서 예사로 태아를 초음파로 찍어대는데, 태아가 뱃속에 덮여 있는 것은 함부로 ‘보지 말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냥 초상화 찍듯이 보는 게 문제입니다. 이게 불경이죠. 예전에 배아줄기세포랑 관련해서 황우석 교수 사건이 있었죠. 당시 유일하게 가톨릭교회에서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했어요. 다행한 일이지만, 교회에서 왜 성체줄기세포 연구는 반대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돼요. 수태 후 얼마가 지나면 생명인지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건 과학자들이 저들 편의대로 지어낸 억지논리입니다. 황우석 교수 사건은 ‘사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연구’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인간생명을 기계처럼 보고 아프면 갈아 끼울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불경’(不敬)입니다.
이런 불경스런 문화는 죽음을 악으로 취급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섭리잖아요. 그러니 신앙인이라면 병들고 죽는 것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생로병사를 통틀어서 생명입니다. 태어나서 건강하게 사는 것만 삶으로 인정하는 문화는 잘못된 것입니다. 한창 기운이 팔팔하고, 성생활도 왕성하고, 머리에서 윤기가 나고, 얼굴도 잘 생기고, 이런 게 ‘표준’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이런 병든 사회에서는 누구나 돈을 들이든지 성형외과를 가든지, 보약을 먹든지, 화장을 하든지 건강한 상태로, 젊은 상태로 복원하려고만 들어요. 이게 얼마나 천박한 문화입니까? 이게 잘못되었다고, 그래도 희미하지만 거부반응을 보이는 유일한 사상계가 가톨릭교회입니다.
미국에서 부시정권 때 백악관 생명윤리위원장을 맡았던 레온 카스(Leon Kass)라는 분이 있었어요. 미국에서는 그 사람이 적극 반대해서 배아줄기세포 연구 같은 게 진척되지 않았는데, 레온 카스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알기 전에 몸으로 아는 진실이 있다.” 논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학자로서는 하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그렇지만 생명 문제는 합리적 언어로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겨움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배아줄기세포가 생명이냐 아니냐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역겹다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이런 사람을 싫어하지만, 저는 이런 사람을 열렬히 지지합니다. 정말 중요한 진리는 머리로 알 수 없어요. 진짜 진리는 명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제3차 가톨릭일꾼세미나(2018.7.28-29) 강연 녹취 풀이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8년 8-9월호(통권 14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