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를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델로 삼았다. 그의 고독한 투쟁과 우리의 고뇌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고흐는 내가 감히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그렸고, 내가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것에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내가 나의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했고,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더욱 깊고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고흐가 겪은 외로움과 고통이 나의 외로움과 고통을 상기시켰지만, 고흐의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그림뿐 아니라 동생 테오와 나누었던 편지를 통해 우리를 더 깊은 차원으로 건너가게 해준다. 헨리 나웬은 고흐의 편지가 “살아계시고 느낄 수 있는 분, 참으로 위로와 위안을 주시는 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진정 보살피시는 분을 찾는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과 마주하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고흐의 하느님은 매우 실제적이고 매우 직접적이며 자연과 사람들 안에서 쉽게 만날 수 있고 연민의 마음이 지극하며 그토록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끝까지 철저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었다.
“고흐는 성공에 이르는 열쇠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자기 인생 여정에 어떤 교훈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글과 그림을 통해 우리는 전혀 새로운 모습의 영적 지도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고군분투하고, 실패하고, 사방이 가로막혀서 혼란스러워하고, 실험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낡은 희망을 저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지도자의 모습이다.”(<하느님의 구두>, 클리프 에드워즈, 솔, 2007)
고흐, 선교사에서 화가로 개종하다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고흐가 막연히 바랐던 것은 본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교사와 성직자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또는 선교사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의 아들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는 등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무엇이 됐든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1876년에 영국에서 감리교 목사를 보좌하는 임시직을 구해 리치몬드의 한 작은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할 기회도 얻기도 했다. 그때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설교대에 섰을 때 나는 마치 어두운 지하 동굴에서 빠져나와 한낮의 밝은 햇살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디가 되었든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고흐의 막연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학진학을 위해 예비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벨기에의 한 복음교회 학교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결국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탄광촌 보리나주에 수습선교사로 갔다. 그러나 복음교회는 수습기간이 끝나자 그를 면직시켰다. 교계는 그가 ‘품위 있는 복음전도사’가 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더러 광부들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처럼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움막에서 광부들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설교하는 것은 교회의 품위를 훼손한다고 여겼다.
고흐는 면직처분을 받고 뭔가 다른 가치 있는 찾기 위해 탄광촌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고흐는 “새들이 털갈이 하는 시기처럼 우리 인간에게도 역경이나 불운이 닥치는 힘든 시기가 있게 마련인데” 그럴 때는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이 시기에 고흐는 엄격한 교계제도에 대한 깊은 실망도 드러냈다.
“복음전도사들도 예술가들과 같다고 말해야겠구나. 혐오스럽고 고압적인 오래된 학교가 있고, 공포가 가득하며, 편견과 관습의 철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지. 이런 자들이 책임을 맡게 되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직위를 관리하고, 딱딱한 형식주의를 내세워 자기 신자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고흐는 자신이 ‘새장에 갇힌 새’라고 여겼다. “새장은 여전히 닫혀 있고 새는 고통으로 미쳐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서 새장을 열고 나갈 방법으로 발견한 것이 그림이었다. 고흐는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그들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관심을 받아야 할 이들, 그러나 우리가 무시하고 잊고 지내는 이 일꾼들의 얼굴을 ‘사람들 눈앞에’ 데려오기로 했다.
“광부들과 직조공들은 아직도 다른 노동자나 장인들과는 다른 부류로 취급되고 있다. 참 딱한 이들이다. 언젠가 이 이름 없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그려서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저 깊은 구렁텅이 갱도 끝에서 나오는 이들, 바로 광부들 말이다.”
고흐는 본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이제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이 연약하고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신앙적 의무를 일깨워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 안에서 이 잊혀진 사람들과 공감하였고, 그들 내면의 빛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길을 찾았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나는 자주 끔찍한 고뇌에 빠지곤 하지만 이런 내 안에도 잔잔하고 깨끗한 음악이 흐른다. 가난에 찌든 통나무집, 그 가장 지저분한 구석에서도 그림들이 보이는구나. 내 마음은 어쩔 도리 없이 이런 것들에 이끌린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가는 순례자
고흐는 리치몬드에서 행한 첫 설교에서 “저는 이 땅에서 이방인일 뿐 제게서 당신 계명을 감추지 마소서.”라는 시편 119장을 읽으며 자신을 ‘순례자’라고 말했다.
“우리 삶이 순례의 여정이라는 오랜 믿음은 좋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방인일 뿐이지만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순례자이며, 우리 삶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향하는 길고 긴 여정입니다.”
고흐는 젊은 시절 화랑 점원으로 파리와 런던에 갔고, 선교사로 벨기에에 머물렀으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밀밭과 과수원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파리 북서부 우아즈 강변의 오베르에서 생애 마지막 70일을 보냈다. 화랑 점원이었던 동생 테오는 매달 얼마 되지 않은 수입의 일부를 떼어 형의 숙식비와 그림 도구를 살 돈을 보내주었다.
테오가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이었지만 고흐는 그림으로 자기 생계도 꾸리고 동생에게도 보답할 수 있기를 늘 바랐다. 하지만 고흐는 그림은 전혀 팔리지 않았고, 테오에게 보내진 그림들은 둘의 공동소유로 여겨졌다. 사실 그래서 연필을 잡기 시작해 10년 동안 고흐가 그린 작품들은 고스란히 남을 수 있었다.
[참고] <하느님의 구두 (The Shoes of Gogh)>, 클리프 에드워즈, 솔, 2007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