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주차장을 짓느라 천국을 포장했어요, 콘크리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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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주차장을 짓느라 천국을 포장했어요, 콘크리트로
  • 이송희일
  • 승인 2024.08.2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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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 칼럼

2008년 미국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땅 해방 운동'이 미국과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른바 디파베(Depave)운동. De- + pave(포장하다). 포장을 벗겨낸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콘크리트 바닥과 아스팔트를 뜯어내는 운동이다.

어떻게 시작된 걸까? 우연한 계기였다. 2007년 한 젊은 남자가 포틀랜드로 이사를 오게 됐는데, 아스팔트로 덮인 뒷마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뒷마당에서 아스팔트를 뜯어냈다. 뒤이어 그곳에 나무와 꽃을 심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카페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지불할 테니 자기네 앞마당에서 콘크리트를 제거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스팔트를 뜯어낸 청년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그곳을 푸르게 가꾸고 싶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도시 녹화운동인 Depave를 시작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비영리 조직을 결성하고 자발적인 자원활동가들과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에는 3개의 프로젝트, 그 다음 해에는 5개의 프로젝트, 그리고 지난 15년간 포틀랜드 전역의 학교 운동장, 교회 및 여러 지역 공간에서 80여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명성을 얻게 됐다.

이렇게 포틀랜드 어느 뒷마당에서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디파베 Depave 운동. 지금은 시카고, 시애틀, 클리블랜드를 넘어 캐나다, 영국, 프랑스, 호주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콘크리트를 뜯어내라

사람들은 왜 콘크리를 뜯어내고 싶어하는 걸까? 콘크리트가 인간과 자연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땅을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투명성 재질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도시 공간을 뒤덮으면서 물이 투과되지 못하게 됐다. 이에 홍수와 침수가 빈번해지고, 또 도시 오염이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는 열을 흡수하기 때문에 '도시 열섬' 효과를 일으킨다. 열기가 도시 안에 갇혀 찜통이 되는 것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나무와 풀을 심으면 토양이 숨을 쉴 수 있다. 빗물을 빨아들여 홍수를 조절하고 지역의 수질을 향상시킨다. 또 기온을 낮출 수 있다. 그러면 열섬 효과를 낮춰 에너지 수요와 대기 오염 등도 덩달아 줄게 된다.

예를 들어, 포틀랜드에 이어 시카고에서 디파베 Depave 운동의 바톤을 받았던 이유는 2010년 시카고를 덮쳤던 재앙적 홍수 때문이다. 빗물이 투과되지 못하고 저지대로 몰려가면서 홍수와 침수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제 골목길마다 콘크리트를 벗겨내고 풀과 꽃을 심어 '빗물 가든'을 조성했더니, 빗물 투과율이 좋아지고 침수가 줄었다.

영국 런던에서는 지자체 의지에 따라 포장 제거 작업을 지원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전국적으로 도시 녹화 사업에 5억 유로를 지원하는데 포장 해체 작업도 지원 대상이다. 프랑스가 이렇게 하는 데는 최근 몇 년간 프랑스에 닥친 폭염과 도시 열섬 현상 때문이다. 폭염의 도시에 회복력을 주기 위해선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땅을 숨쉬게 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디파베 Depave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절감했다. 콘크리트 제거 작업은 환경정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 왜냐하면 가난한 지역일수록 녹지가 빈곤하고 공간이 집적되면서 폭염과 홍수, 오염에 더 시달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인종주의적인 도시계획인 레드 라이닝에 따라 대부분의 도시가 계급적-인종적 불평등으로 구획되어 있다. 부유한 곳에 녹지가 더 많다.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 서울을 보면 서초구, 강남구는 그나마 녹지가 많은데 강북 위쪽으로는 녹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일부 구간에서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디파베 운동은 녹지와 토양 빈곤이 현저한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도시 녹화는 환경정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1970년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인 조니 미첼이 <Big Yellow Taxi>라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가삿말이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은 주차장을 짓느라 천국을 포장했어요."

미국 도시는 평균적으로 자동차 도로와 주차장이 도시 공간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뉴욕 같은 거대 도시의 경우 그 비중이 60%까지 올라간다. 확실히 기괴하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는 근대화의 표지이자 성장주의의 상징이다. 애초에 아스팔트는 자동차 속도와 자본 축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도시인들 상당수가 콘크리트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오염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요컨대, 식민화된 상상계다.

하지만 정반대다. 콘크리트에 짓눌려 있던 땅이 숨을 쉬면 사람의 숨결도 가벼워진다. 덜 덥고, 더 안전해진다. 자연에 더 가까워진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자연과 단절해놓고 날이 덥다고 짜증을 내는 우리 도시인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형용모순이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 대응한답시고 생물다양성협약 30X30 같은 걸 만들어 멀쩡하게 자연과 살아가는 전세계 선주민의 땅을 빼앗는 패악질을 일삼느니, 이렇게 각자의 도시를 재자연화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다.

1968년 프랑스 혁명 당시 “보도블록 아래, 해변(Sous les pavés, la plage)”은 주요 슬로건이었다. 보도블럭 아래에 진짜 휴식과 자연이 있다는 의미다. 지배 질서를 뜯어내듯이, 보도블럭을 뜯어내자는 상황주의자들의 이야기는 당시에는 너무 허황되고 낭만적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RTS 등 이후의 도시 공유지 운동에서 잠깐 빛을 발하긴 했지만 구체화되지는 못한 터였다.

최근 퍼져나가는 디파베 Depave 운동을 보며, 하기는 이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떠밀려 콘크리트를 뜯어내는 시대가 왔구나 싶다. 아이러니하달까. 뜯어내지 않으면 도시 열섬에 갇혀 쪄죽게 생겼으니 말이다.

여하튼 보도블럭 아래에는 자본주의가 매장한 자연이 있고, 땅이 있고, 휴식이 있고, 삶이 있다.

 

이송희일
1999년 첫 단편영화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성소수자들의 슬픔, 10대들의 외로움과 아픔,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 등을 섬세하면서 강렬한 연출로 그려온 그는, 2006년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끌어 한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후회하지 않아>, <백야>, <야간비행>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홍세화 선생과 대담집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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