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가 한때 몇 차례의 총회를 거쳐 ‘신비와 예언’의 통합을 결의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정부교구에서 새로운 10년의 좌표를 제시했던 이기헌 주교가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과 방한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에 복음의 기쁨을 사는 삶,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선포 등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하셨다.”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느님 백성은 이 세 가지 핵심을 삶의 방향으로 삼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실상 신앙과 실천은 둘이 아니며, 참된 신앙은 참된 실천을 낳기 마련이다. 믿지 않고서야 행할 수 없으며, 행하지 않고서야 믿음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믿음은 사적 개인 안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며, 교회 안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이 신앙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굳이 ‘혁명가’라고 부를 필요도 없고, 시대 조류에 맞춰 ‘현자’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사실상 그분은 ‘민중적 지혜를 통해 혁명으로 나아간 사람’이다. 여기서 혁명이란 관습적 가치를 거슬러 세상과 다른 가치를 사회구조와 일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맘몬(돈)이라는 우상에 맞서는 영적 투쟁이겠다.
그분이 그저 단순히 현자로만 남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또한 그분을 혁명가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분에게서 어떤 권력을 향한 의지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였다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다. 유대종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사제는 본인의 의식과 상관없이 신분상 ‘권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의 마음을 매만졌으며, 그를 만난 사람은 그 눈길만으로도 치유되었음을 나는 ‘믿는다’. 양은 제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는 법이라고 한 그분의 말씀이 옳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기억이 훗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낳았다. 그러나 예수는 치유자에 머물지 않고 상처의 본질로 전진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 ‘하느님 없는 권력의 무자비함’이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고행의 길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으며, 거기서 무력함으로 무력한 자들을 섬기는 최고의 형식,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