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의 진정한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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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의 진정한 목적
  • 토머스 머튼
  • 승인 2024.06.1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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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
사진출처=scontent.fgdl5-1.fna.fbcd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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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에 모든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초인간이라는 이상을 그리스도교의 개념이기 보다 이단으로 여기는 것은 수도회 역사에 있어 하나의 역설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인 이상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성함에서 인간의 약함과 불완전함은 그가 자신의 비참함에서부터 겸손함을 배우고 하느님의 은총에 더욱 전적이며 완전하게 신뢰 할수록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사도 바오로가 대표적인 예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토 후서 12,7-10).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매우 실제적이고 상대적으로 완전한 평화를 획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마음에 평정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하며 자신을 비정상적인 격정에서 자유롭게 해야 한다. 이러한 내적인 평화 없이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자녀로서 마땅히 즐겨야 할 그분과의 친분을 누릴 수 없게 된다.

평화는 그러나, 가혹한 무력이나 폭력, 독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욕구를 억압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무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성령에 유순하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의 자비로 얻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그분의 현존이 우리의 욕구를 가라앉히고 고치기 힘든 격정들을 평정시키신다.

만약 때때로 우리의 마음 속에 폭풍이 몰아치고 하느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듯 보일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신뢰한다면, 갈등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깊은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께서 갈등을 허락하시는 것이 순전히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평화를 강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완전한 그리스도적 고행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덕행과 고행에 대한 용감함 안에 내재한 지나친 기쁨까지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성인들은 거만하지 않았고 자신만만한 사람들도 아니었으나 그들의 덕행은 그들을 부유하고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의 예레미야 사람들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온전히 자각한 사람들이었다:

노여워 때리시는 매를 맞아
온갖 고생을 다 겪은 사람,
이 몸을 주께서 끌어내시어
칠흙 같은 어둠 속을 헤매게 하시는구나.
날이면 날마다
이 몸만 내리치시는구나.
뼈에 가죽만 남았는데,
뼈마저 부서뜨리시고
돌아가면 성을 쌓아 가두시고
정수리에 저주를 퍼부으신다.
앞길에 가시덤불 우거지게 하여
내 몸을 갈가리 찢게 하시고,
나를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메워 쏘시는구나.
당신의 살통에서 뽑아 쏘시는 화살이
내장에 박혀
날마다 뭇 사람에게
웃음거리, 놀림감이 되었다.
쓴 풀만 먹이시고,
소태즙만 마시게 하셨다.
주께서 돌맹이로 내 이름 부수기고
나를 땅에다 짓밟으시니
나는 언제 행복하였던가,
나의 넋은 평안을 잃었는데.
주여 이 몸 잊지 마시고,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두고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주 야훼의 사랑 다함 없고
그 자비 가실 줄 몰라라.
그 사랑, 그 자비 아침마다 새롭고
그 신실하심 그지없어라.
“나의 몫은 곧 야훼시라” 속으로 다짐하며
이 몸은 주를 기다리리라.
야훼께서는 당신을 바라며 찾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신다.
야훼께서 건져 주시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애가 3,1-5, 11-17, 20-26)

고행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 초연함에 대한 보상으로 마음에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밤이라는 내적인 혼란 상태로 나아가 거기서 자신의 비참함을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곳에서 그의 순결함은 지성과 영성의 순결함으로 변하며, 그의 순종은 인생의 매순간 성령에 대한 직접적인 의존이 된다. 복음의 정신에 따르는 이 숭고한 삶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든 가능한 일이며, 그가 수도자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다.

사도 토마스는 말하길: “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현세의 삶의 약함으로 인해 저지르는 사소한 죄 때문에 많이 괴로워한다”고 한다. 그는 덧붙여: “하느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충분하며, 각각의 성향에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늘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완전한 형제적 사랑이란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제외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약하면 현세에 있어 우리에게 가능한 완전함이란 어떤 것인가? 매 순간 하느님께 직접 향하는 그런 완전함은 아니며 - 심지어 반의도적으로 저지른 경미한 죄를 모두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과 욕구, 행동이 그분에게로 적어도 실제적으로 향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순수해지기 위해 또한 봉헌이 온전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가능한 노력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의 온 가슴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무에 진지하게 충실함을 뜻하며, 생을 통해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완전함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그분의 자비로운 섭리와 사랑에 가능한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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