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다루고 있는 노동의 영역은 깊고 광대하다. 요한 23세 교종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는 현대인과 그의 삶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분열과 싸우고 있다. 노동은 다시금 영적으로 의미 있고 인간적 견지에서 만족스러워야 한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존재의 완전함과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존재 사이에 인위적인 대립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마치 완전해지기 위해서 사람은 현실적인 활동들을 모두 제쳐놓아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행동이 어디서 취해졌든지간에 사람은 인간존재로서 또한 신자로서의 개인적 존엄성에 관해 필연적으로 어떤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일상적인 노동을 통해 자신을 계발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으로, 인간은 모두 현실에 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교사>의 이 구절을 노동자들이 단지 자신의 일을 “영적인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봉헌한다” 내지는 “우리의 의도를 정화시킨다”는 귀에 익은 권고를 반복한 것이 아니다. 이 귀절은 회칙 전체의 내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 존엄성의 자유로운 표현인 노동의 참된 특징과 인간의 창조적인 활동이 사회 자체 내에서 그리스도교적 쇄신에 의해 복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 의해 많은 일이 이루어졌지만 노동의 측면이나 사업 또는 직업상의 측면에서, 그것들은 사실 인간적인 특질을 많이 잃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무질서는 아무리 영적이라 하더라도 내적이고, 주관적인 조정에 의해서만은 고쳐질 수 없다.
그리스도교적 삶 안에서 노동의 위치를 적절하게 복구시키는 일은 각자에게 있어 개인적이거나 내적인 작업 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교회와 인간 사회를 위해 협조해야 하는 객관적인 의무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인 질서에 지적인 관심을 갖고 사회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노동을 더욱 “성화” 시켜야 한다. 단순히 내적이고 개인적인 영적 노력으로는 그 단조롭고 무의미한 돈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 이 작업은 말할 나위 없이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끝없는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 파장은 모든 방면으로 뻗어 나가는데, 정치, 경제, 사업 등 국가와 국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모든 방면에 뻗친다.
우리는 무질서, 혼란, 증폭된 긴장, 고통 받는 사회의 몸통에서 속속 일어나는 분열들로 사면초가가 되었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그리스도교적 쇄신이라는 시급한 과제를 어디서부터 실행해 나갈 수 있겠는가?
<어머니와 교사>는 노동의 영적 가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그 근거로 삼고 있는 신학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후, 정의롭고 진실로 생산적인 사회 건설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과제에는 인간적인 특질 그 이상의 성격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소명과도 같은 성격을 띄었으며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현존 이래 시작되어 온 작업의 연장이었다. 우리는 회칙에서 다음의 글을 읽을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수행할 때 그것이 세속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거룩한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일치한다면, 모든 일은 그분 일의 연장선상에 있게 될 것이며 그것에 구원의 힘이 침투할 것이다...그리하여 그 활동은 개인의 초자연적인 완전함에 도움을 주며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고 우리가 살며 일하는 이 문명에 복음의 누룩을 부풀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우리의 일이 인간성에 대한 봉사가 되지 않는 이상 효과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한 봉사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질서, 문화와 문명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인본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는 어떤 입장이 함축되어 있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