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 요한 23세께서는: “교회는 비록 영혼들을 성화시키고 그들을 초자연적인 질서에 도움이 되는 협조자로 만들어야 하는 특별한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인류 일상 생활의 당면 과제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것은 비단 식량이나 생활의 여타 물질적인 조건들뿐만 아니라 삶의 수많은 측면들의 발전 및 문화적인 측면까지도 포함시켜야....한다.”
교회의 관심이 무엇이건 그것은 교회의 지도층이나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전체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물론, <어머니와 교사>에서 다루어진 경제적인 사안들은 그리스도교의 평신도, 시민, 제조업자, 농부, 정치인, 사업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일상사들이 그리스도교적 방법으로 수행될 때, 다시 말해 하느님에 의해서 성립된 자연 질서에 전적으로 일치되고 교회의 가르침과 규범에 의해 정화된다면 그것은 일상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성화와 구원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교회는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근본적인 인간 활동 중의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간성을 표출해야 한다”는 <어머니와 교사>의 이 구절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 우리의 에너지는 판매 가능한 상품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여긴다면 우리의 재능을 가치 있고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사용하기보다는 판매하는데 더욱 노력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능력과 재능은 우리의 주된 목적인 “돈을 버는 것”에 종속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스러운 질서에 반하는 것인데, 인간의 재능을 선하고 효과적인 일에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인간적이며 만족감을 주는 활동이고, 정당한 임금을 주고 가족을 부양하는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인간의 몇몇 근본적인 영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무질서한 사회적 상황 하에서 노동은 이 근본적으로 건강한 특질을 잃어버리고 절망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노동이 단순히 생각 없는 노역이 되거나 기계나 현대의 수 없이 많은 기계적인 일상의 노예로 전락하며 임금만을 목표로 할 경우, 노동자의 정신과 체계는 본능적으로 비이성과 무질서함에 반항하게 된다. 반면, 사람들은 긴장을 완화시키는 레크리에이션을 통해 의미 있는 활동을 하려고 함으로써 그들의 지루한 일상을 극복하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영적인 영감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단조롭고 무익한 작업 과정에서 탈출해 영적인 영역으로 나아가 그 곳에서 기도와 기계적인 세상과는 명백히 아무 상관도 없는 하느님과 대화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한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꽤 자주 발생하곤 한다. 이 경우 무질서가 심각하게 악화된다. 사람은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전적으로 거기에 빠진다. 그는 사업의 관례와 복잡함에 너무 몰두하게 되며 계획을 세우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일에 지나치게 빠져 다른 모든 것의 의미를 잃게 된다. 가정은 둘째(또는 셋째)의 일로 뒷전으로 밀리며 그 의미를 잃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최종 목적을 방해 할 경우 인간관계는 양면성을 띄게 되고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피상적이 되고 긴장에 싸이며 거짓으로 가득하게 된다. 순수한 인간적 특징들은 시들게 된다. 자신이 존재 안에 지어 놓은 모순들을 따라가고 맞추기 위해 그는 술이나 진정제-아니면 둘 다-에 의지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진정한 영성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종교는 기껏해야 허식, 외적인 형식, 또는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욕망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나중”에 가서야 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