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는 방식을 보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왔다는 것이 별로 증명되지 않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기반은 이미 예수가 아니고 복음적 가치도 아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보다 이 세상의 가치기준과 돈과 권력에 그 삶의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6,24)는 복음적 선택과 결단이야말로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는 동시에 두가지를 섬기려 한다. 사실상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적(敵)은 박해가 아니라 유혹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님됨과 화해될 수 없는 사고방식, 생활방식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 일 뿐이다.
지금의 교회 모습은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들과도 같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해있는가, 먼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 예컨데 복음선교, 봉사, 성령운동 등등이 교회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시대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되라는, 예수의 교회가 되라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교회는 누구의, 무엇의 교회가 아니라 바로 예수의 교회이어야만 한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교회 또한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일 뿐이다. 하느님 나라가 교회 존재의 유일한 목적이며 합법화의 근거이고 판단 기준이다.
교회의 사명 역시 현실의 맥락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데 있다. 이 하느님 나라의 구현은 곧 산상수훈에 나타난 가치관을 역사 속에 육화시킴으로써 성취된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며 약속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견지하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행동을 인식하고 해방을 향한 가난한 이들의 여정을 돕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되고 향해야 할 교회(=하느님 나라) 모습과 현재 교회의 모습은 아주 대조적이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엿볼 수가 없으며, 교회 모습은 예수와 전혀 닮은 꼴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소외와 억압 속에 살고 있으며, 교회는 이들에 대해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또하나의 소외구조가 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교회는 삶의 방향과 원칙에 있어서 복음적 가치 보다는 기존 사회체제에 종속되어 왔다.
다행히 지난 수십년 간 성령의 역사하심은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교회가 자신의 정체와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도록 이끄셨다. 지금의 교회모습은 예수와 닮았는가? 오늘의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모델인가? 제3세계와 브라질의 변두리 교회들은 교회의 제도나 틀이 아니라 역사를 꿰뚫어 활동하는 성령의 생명력을 믿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예수의 애정을 닮아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자신이 먼저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교회의 자기해방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예언적 사명 실천에 대한 제3세계와 브라질 주변 교회들의 이러한 각성은 교회의 본질과 형태에 관한 전(全)교회적인 물음과 반성에로 이끌었다.
교회의 새로운 움직임
이러한 변두리 교회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우선 유럽 교회에서 발견되는 희망적인 첫번째 경향은 복음을 읽고 나누는 일에 관심이 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럽교회를 위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인위적인 전통에서 교회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진정한 복음화는 신앙의 핵심과 본질에 다다를때에만 가능하다.
유럽교회의 두 번째 희망적 징표는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동체와 그룹들이다. 교회 조직의 변화는 작은 공동체에 의해 구성된 기초들로부터 가능하다. 공동체 안에서의 참여는 교회를 제도로부터 극복하고 교의적인 형식주의에서 탈피시켜서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다.
또한 유럽교회에서 발견되는 세 번째 희망적 경향은 제3세계와의 연대가 싹터가고 있다는 점이다. 제3세계는 제1세계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그들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에 관심과 연대없이 유럽교회는 결코 자기신원을 올바로 깨달을 수 없다.
또하나의 새로운 교회의 움직임으로 아프리카의 교회를 들 수 있다. 그 한 예로 오늘날 아프리카 자이레 전지역에는 수천개의 소공동체들이 있으며 그 다양성도 엄청나다. 자이레의 교회는 독특하다. 서구로부터 수입된 무거운 구조로부터 교회는 활기차고 생동감있는 공동체들로 변화하였다. 피라밋식 성직자 중심의 구조로부터 여성과 남성이 지도적 역할을 함께하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변화되었다. 또한 예식중심으로부터 삶 중심의 교회로 바뀌었다. 공동체의 새로운 탄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이레의 교회에 성령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귀여겨 들음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미래의 교회상
교회는 결코 제도가 아니며 완성품이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변함이 없으나 그 존재방식은 항상 변할 수 있다. 제 3세계 주변 교회들의 새로운 변화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명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면 복음적이며 예수의 삶과 하느님 나라라는 교회원형에 보다 가깝게 닮은 교회상은 무엇일까?
성서에 따르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그 사람들이란 돈많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는 가난했고 사도들도 가난했다. 그러므로 교회 역시 가난해야 한다. 예수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하셨듯이 교회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해야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교회여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선심을 베푸는 교회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난한 교회라는 뜻이다. 사치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장식되고 화장되지 않은 교회, 진리나 구원에 있어 독선적인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 교회는 인간발전을 위한 현실적 세상의 관심사를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자기자신에게만 골몰하거나 자기 구조 속에 폐쇄되어 있지 않은 교회, 인간 삶의 모든 사건들을 성사화하는 역동적 교회이다.
참 교회는 도래하게 될 새 세상-하느님 나라의 누룩이요 반죽을 부풀게 하는 효소와 같다. 그 교회는 예언하는 교회요, 해방하는 교회이다. 불의를 고발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뜻을 보여주는 교회이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순례하는 교회이다. 순례하는 교회는 움직일 수 있는 발이 있고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출발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부단히 자체의 생활양식을 교정하고 끊임없이 쇄신과정을 밟는 교회이다.
예수의 교회는 작은 교회이어야 한다. 작은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군중이 아닌 삶과 관심사가 공유되고 나눔이 있는 공동체적 교회이어야 한다. 미사와 세례성사, 혼배, 장례식을 사기 위해 익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신앙의 시장이 아닌 인격의 교류가 있는 인격화된 교회여야 한다. 또한 교회는 규칙과 기구들과 자동적인 예식들로 가득찬 교회가 아닌 성령의 생명력으로 가득찬 교회, 카리스마적 교회이어야 한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