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제자들이 예리고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가고 있었다. 그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보는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마르코 10,46-47. 51-52)
지난해, 내 친구 하나가 두 번째로 다리를 부러뜨렸다. 부상은 보철무릎 때문에 복잡했다. 즉 다섯 번째의 암진단과 지금까지 했던 치료의 후유증이 심각했던 것이다.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친구는 사회보장 장애보험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적인 30살의 유럽계 미국여인은 우리나라의 유수한 대학 중의 한 대학을 졸업했고 예술, 과학 분야에서 일했고 작가로서도 일하고 있다. 그의 의료역사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되었는데 별로 원하지 않는 경험들을, 즉 의료보험체제를 오랫동안 항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장애등록 을 위하여 15페이지 이상의 신청서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질려서 그는 낫고 싶은 생각을 포기할 정도였다.
내 친구를 집에서 돌보고 있었던 (가정간호보조원) 여인 또한 30세 정도의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계통의 미국인으로 세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독신엄마이다. 수년동안 때때로 그는 정부 보조에 의지해야 했고 따라서 기관들, 행정절차와 규칙의 미궁에 문외한이 아니다. 지난해 그는 그를 고용했던 직장에서 해고 됐고 그것을 계기로 그 분야의 노동자들은 조직화 를 외치고 있다.
실업 때문에 경제적으로 쪼들리자, 이 여인은 실업수당을 타려고 애쓰면서 무서움과 분노, 곤혹감을 느꼈다. 아무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려고 하지 않으며 이 여인들에게 “당신은 내가 무슨 일을 해주기를 바랍니까”라는 질문을 묻지도 않는 것 같다.
사랑과 존경
똑똑하고 정직한 이 여인들이, 하나는 병에 대처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는 책임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하여 그들을 돕기 위한 목표를 갖고 있는 단체들에 접근할 때에, 그리고 각자가 과거에 일했던 조건에 따라 이 복지체제에 기여했던 바로 이 사람들이 그 체제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힘들게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 두 여성들은 많이 참을성 있는 끈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기로 되어 있는 혜택들을 점차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들의 경험을 표현하는 사람들조차 그런 힘든 어려움을 겪는데, 그들보다 혜택을 받지 못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글을 모르는 사람들 혹은 반쯤만 읽을 수 있는 사람들, 혹은 그들의 모국어로 된 서류양식서를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정신적 혹은 정서적 장애 때문에 참을성에 한계가 있거나 상호적 관계의 기술이 없는 우리친구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또 미국의 사회복지기관이나 보건의료체제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어서 절차나 인터뷰 그리고 요구 되는 서류작업 때문에 무시당하거나 혼동을 겪는 사람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우리의 사회체제는 “내가 당신을 위하여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 하고 묻는 예수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가? 슬프게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자주 “아니오!” 라고 들린다.
우리는 마르코 복음에서 수차례 예수가 사람들이 말로 표현한 필요에 응답하고 있는 모습을 읽는다. 예수는 시로–푀니키아 여인과 회당장의 딸을 치유한다. 듣지 못하고 그래서 말하는 것도 힘들던 사람은 친구들이 그들의 고통받는 동료에게 손을 얹어달라고 예수께 간청한 후에 치료된다.
다른 복음에서도 이런 예들이 풍부하지만,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우리 복지기관들의 해결책들은 예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정신과 사람들의 필요를 거의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문화는 사람들의 필요에 대하여 제도적인 응답을 함으로써 무시해 버리고 비인간적이며 때때로 배타적이고 금지하는 것들이 지나치게 많다.
물론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들을 깊이 보살피며 열심히 일하는 헌신적인 훌륭한 사회복지사들도 있고, “도움을 주는 전문가들”도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복지사들은 신청자들에게 요구되는 합법적 절차를 확보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는 문지기 역할로 전락한다. 상대적으로 볼 때 별로 많지 않은 “복지사기꾼들”, 어떤 언론에 의하여 편파적으로 보고되는 복지사기꾼들을 집어내느라고 정신이 없다.
좋은 의도를 갖고 사회복지체제에 일자리를 얻은 이상적인 대학 졸업자들은 사람들을 돕고 세계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수년간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 사례들, 다룰 수 없이 거추장스러운 관료적인 체제와 가난이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실망하게 된다. 이런 많은 젊은이들은 냉소적이 되거나 사회복지분야를 떠난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마도 체계적인 응답자체가 문제의 한 부분인 것 같다.
우리 가톨릭일꾼운동도 하나의 사회로서 지난 75년 동안 돈과 시간을 쓰며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써왔다. 그리고 우리의 체계적인 해결책들은 “전문가들”–사회학자들, 상아탑 사람들, 저자들과 기타 전문가들에 의해 자주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들은 아프거나 가 난하고, 배고프거나 집이 없는 '사람들'이지 '사회문제들'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은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해도 자신들의 요구들과 필요 따위를 스스로 표현할 수 있으며, 우리들 대부분처럼,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묻지 않고 주제넘게 말해달라고 할 때에 분개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우리의 사회복지기관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며 사회복지기관에 접근할 때 마주치게 될 장애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또한 소위 전문가들은 대개 가난한 이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지 못한다.
거시적으로 통찰력 있는 관점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이러한 전체적 접근은 대부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가?” 라는 복음적 질문을 묻지 않는다. 그 결과, 전문가들은 사람들의 실제 요구,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체제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지난 수 십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하여 수많은 활동가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의 체제가 마련해놓은 도움을 사람들이 얻도록 도와 주는데에 쓰고 있다!
루시아와 쟈넬라는 성 요셉의 집에 살았고 일했으며 지금도 공동체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는데, 지금은 “복지분야의 보조자들”로 고용되어 일하고 있다. 쟈넬라는 우리인근에서 가난하고 집없는 이들을 도와온 홀리네임(거룩한 이름) 센타에서 일한다. 쟈넬라는 길거리의 많은 우리 친구들이 하룻밤 잘 곳을 급하게 얻기 위하여 필요한 유효 증명서나 혜택을 얻도록 도울 때 그가 직면하게 되는 장애물들에 대하여 점심 시간에 자주 말하곤 한다. 이런 문제는 대부분의 노숙자들이 직면하는 문제인데, 특히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 이주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유효 한 신원증명서를 얻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루시아는 성모몽소승천의 작은 자매회에서 운영하는 보조부에서 책임자로 일하는데 특히 동쪽 할렘가의 가족들을 크게 돕고 있다. 루시아도 사람들이 쉴 곳, 보건의료와 음식을 얻도록 돕거나 단순하게 서류 작성하는 일을 돕는 일에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 보조자들은 철거나 집세 등 주택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있으며 소위 “청문회”에 사람들과 함께 참석한다.
보조자들에게 사람들이 가져오는 문제들은 우리나라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직면한 엄청난 문제들의 범위만큼이나 다양하다. 보조자들은 앉아서 듣고 도움이 될만한 질문들을 물으며 “대상자들”의 인품, 태도를 보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자주 직접적으로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묻는다.
보조자들의 일은 감탄할 만하다. 그러나 한 사회로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돕기 위하여 왜 이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중재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가?
신뢰
나는 정부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혜택을 더 많이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주장을 할 것이지만, 실상 진정한 해결책은 개인들로부터 올 것이라고 믿는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우리 각자가 복음의 정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길 원합니까?”라고 물을 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질문을 제대로 그리고 진정으로 우러나서 할 수 있으려면, 권위가 아니라 신뢰에 기반을 둔 관계들을 세워야하고 계층, 인종 혹은 장애에서 비롯되는 편견들을 깨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각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해야 한다.
사회사업가들과 기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관료적인 요구와 규칙들 대신 그들 앞에 있 는 “가난한 사람의 울부짖음”과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경청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비난을 받거나 심지어 해고될 위험도 무릅써야 할지 모른다. 실제로 노숙자가 공공장소에서 잠을 잘 경우 체포하라는 뉴욕경찰서의 지시를 거부한 에드아르도 드라크루즈 순경은 임금지불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는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 주었다.
가톨릭일꾼들인 우리들과 보조자들마저도 매일매일 우리운동의 규칙을 지키는 일과 때때로 성을 내고 요구가 많은 손님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가 말했던 것처럼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길 원합니까?”라는 똑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2003년 5월)
출처: <참사람되어> 2010.9.
원문출처: <The Catholic Worker> 2003년 5월, by 짐 레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