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데모,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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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데모,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 한상봉
  • 승인 2019.02.2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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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17

아리마태아 출신의 동료 의원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거둘 수 있도록 빌라도에게서 허락을 얻어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요셉이었는데, 마음으로 예수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산헤드린의 교활한 늙은이들 틈바구니에서 저런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내게는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저마다 노욕(老慾)을 채우기 위해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 요셉은 항시 의회의 창 너머로 먼빛을 바라보는 듯 했지요.

의회는 이미 영적 활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가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요한을 두려워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웠지요. 낙타털옷을 입은 요한의 행색 자체가 그들에겐 도전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요한은 전형적인 예언자의 모습을 띠고 지팡이 하나로 세상을 질타할 것만 같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평온한 일상에 균열이 생길까 걱정하여 우왕좌왕하였던 것입니다.

날마다 요한을 염탐하고 돌아온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굴렀는데, 이번엔 예수란 젊은이가 남루한 행색으로 사람들을 몰고 다닌다고 불안에 휩싸였지요. 예수는 요한과 달리 지팡이가 아니라 두 손으로 사람들을 감싸주었고, 부드러우면서 단호한 눈매 때문에 의원들은 더욱 신경이 거슬렸습니다. 이번엔 아녀자들과 아이들까지 그를 따라 다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제거해야 한다고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요셉은 “두고 보자”고 다독거리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그저 흘러가버릴 소동이라는 게지요. 먼저 그가 하느님의 사람인지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는데, 그 점에선 저랑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의원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처음부터 도통 관심이 없었고, 당장에 그가 문제를 일으켜 로마의 심기를 건들릴까 안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동굴 속 같은 회당을 벗어나 자주 예수에게로 갔습니다. 저자거리에서, 들판에서 잔잔한 바람에 파동 치는 물결 같이 생기에 가득 찬 예수와 군중들의 시선을 지켜보고, 어떤 상서로운 기운을 느꼈다고도 했습니다.

밉게 보려고 하면 어떤 말이라도 비위를 틀어지게 하겠지만, 곱게 보자면 그 사람의 진정(眞情)을 헤아리는데 마음을 쓰게 되는 법이지요. 요셉이 예수에게로 가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그는 말이 없어지고, 뭔가 깊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예수를 보호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대사제 카야파의 심중을 꿰뚫어본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이었습니다.

카야파는 백성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말하곤 했던 거지요. 그러나 누군가를 죽여서야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전이란 얼마나 구차하고 부실한 것입니까? 카야파는 본래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권력욕과 백성에 대한 자비, 그리고 주님의 의지를 혼동하였던 것입니다. 정작 자신을 죽여 세상을 구할 이는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셉에게서 전갈을 받자마자 곧 서둘러 몰약과 침향을 챙겨들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요셉은 이미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근처에서 빈 돌무덤을 발견하였고, 예수를 장사지낼 채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살아서 돕지 못한 사람을 죽어서라도 돌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 했겠지요.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곱게 시신을 싸서 동굴 가운데 뉘였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 두 사람은 한참을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예수에게 마음을 열어 먼발치에서라도 희망을 본 것 같았던 두 사람이지요.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말했던 대로, 그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도 이 음습한 동굴처럼 컴컴한 밤중이었지요. 사람들 눈을 피해 찾아갔을 때, 그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지요.

그가 성전에서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집어엎을 때, 성전의 더러운 악습을 소상히 알고 있는 저로선 무척 통쾌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하였지요. 부패와 비리의 온상을 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소식으로 들렸지요. 그런데 이 부패한 땅마저도 하늘에서 비롯되는 거듭남이 없다면 무망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거지요. 거룩한 인간이 거룩한 세상을 연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하였지요. 그래요, 사람들은 그마저도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는 광명한 대낮에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으나, 어둠에 속한 자들은 그를 어둠에 가두어 두고야 안심하는 모양입니다. 밤중에야 그를 찾아갔던 그날이 지금은 부끄럽기만 합니다.

급기야 우리가 동굴 밖으로 나왔는데, 아직도 햇살이 언덕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빛 한가운데 서서 약간의 현기증을 일으키는 순간, 그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었던 말이 정수리에 박혔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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