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말엽에 그려진 러시아 이콘 <성령강림>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란 근본적으로 공동체 안에서의 삶”임을 알려준다. 헨리 나웬은 “나 자신도 하느님과 나의 절친한 관계에서, 우리의 믿음, 우리의 희망, 우리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여전히 나의 믿음, 나의 희망, 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발견한다”고 고백했다. 대부분 신앙인에게 주된 관심사는 나의 ‘개인적’ 영성생활이다. 그러나 <성령강림>은 하느님께서 먼저 공동체 안에서 신적인 사랑을 충만히 드러내신다는 것, 그리고 복음선포는 주로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1. 타원형으로 앉은 그리스도인
<성령강림>에서, 복음사가들과 사도들은 반타원형으로 매우 차분하게 앉아서 질서와 평화와 엄숙함을 드러낸다. 대칭과 균형이 돋보인다. 이런 고요함은 성령강림절 이야기(사도 2,1-13) 와 대조된다. 하늘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세찬 바람, 혀 같은 불길, 여러 다른 언어로 말하는 이야기들, 어리둥절함, 경탄과 “술에 취했군!”하는 말이 나올 정도의 흥분을 이 이콘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하늘을 상징하는 원의 일부에서 내려오는 12개의 짧은 빛줄기만 보여준다.
여기서 성령강림절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사도들과 복음사가들이 모여 앉은 방식은 내재하시는 하느님이 현존을 나타낸다. 그리고 타원형 한가운데 열린 공간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새로운 내적 공간을 상징한다. 이제 제자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그들에게 하느님은 더 이상 이들에게 이방인도, 예측할 수 없는 안내자도, 이해할 길 없는 낯선 이도 아닌 분이 되었다. 하느님은 제자들 안에서 사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와 신뢰를 채워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이시다. 바로 이 성령께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코린 12,3)라고 고백하게 하신다.
이 성령께서 관리들 앞에서 그들이 할 말을 일러주시고(루카 12,12), 지혜를 주시고(사도 6,10), 결정을 내리게(15,18) 이끄신다. 이 성령이 이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요한 20,33)과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마르 16,20)을 주신다. 그래서 이제 바오로 사도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제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2. 개성있는 그들 안에서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성령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은 믿는 이들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분이다. 이 이콘은 공동체란 공동관심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의 똑같은 숨결과 사랑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일러준다. 이 이콘에서 복음사가들과 사도들은 서로 바라보지도, 서로 말하지도, 더불어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내재하시는 하느님께 함께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공통된 심리적 상태를 다루지 않는다. 서로 다르면서 일치할 수 있는 것은 신적인 영의 빛줄기 때문이다.
이 이콘의 작가는 각 사도와 복음사가들에게 고유한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들의 머리카락, 눈과 머리의 움직임, 손짓, 다리와 발 모양이 너무 다르다. 이런 차이는 짙고 다양한 색감을 통해 더욱 돋보인다. 어느 색도 다른 색을 지배하지 않는다. 바울로는 똑바로 앉아있는데 엄격하고 지적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약간 등을 구부리고 있으며, 요한은 머리를 기울이며 정을 주는가 하면, 마태오와 마르코는 팔을 뻗치고 뭔가 설명하려고 애쓴다.
3. 세상을 위한/향한 공동체
성령께서 만드시는 그 믿음의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해방을 위해서 이루어졌다. 이콘 하단에 있는 깜깜한 문 안에 서 있는 임금 차림의 형상은 해방이 필요한 세상을 가리킨다. 다른 복음사가와 사도들과 다르게, 이 사람은 생명력이 없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그 사람이 서 있는 어둠 밖에 없는 타원형의 문은 왜 있는 걸까? 제자들 한가운데 생긴 이 열린 공간을 비워두지 않고 어두운 문을 그려놓은 이유는, 성령강림절이 아름다운 끝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다그치는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기가 넘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하나로 묶어주신 그 성령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루카 1,79)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라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낸다.
결국 <성령강림>은 내적인 평화와 조화를 지녔을 뿐 아니라 하나의 부르심으로 이끈다. 행동을 바라는 긴급한 호소가 덧붙여졌다. 수많은 이들이 어둠 속에 살고 있으며, 이들은 하느님 말씀이 지닌 구원의 빛을 기다린다. 그래서 열 두 제자들의 손에는 두루마리와 책이 놓여 있고, 마찬가지로 임금의 모습을 한 어둠 속의 그 사람 손 위에도 12개의 두루마리가 놓여있다. 이 해방의 과업은 혼자서 응답할 수 없다. 세상의 권세가 포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강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공동체만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신하면서도, 세상의 권세에 휘둘리지 않고 복음으로 세상 깊숙이 개입할 수 있다. 비록 이 공동체는 연약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느님의 성령에게서 해방시키는 능력을 부여 받는다. 그러므로 이 이콘은 우리에게 세상이 해방되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고, 또한 이를 위해 일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결국 <성령강림>은 기도와 직무, 묵상과 행동,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장과 불안한 세상에 대한 사명을 한데 모은다. 이 믿음의 공동체는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지만, 또한 세상을 해방시키라는 부르심을 받고 나가게 하는 중심이 된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공동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아있다. 성령강림절에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은 그 사랑의 영인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 신적 삶을 닮은 공동체를 창조하신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삶을 닮았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9.12)
예수님을 아는 믿음의 공동체는 그분 사랑을 드러내라는, 그래서 무서운 세상 한가운데서 희망의 징표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참고]
<러시아 미술사>(이진숙, 민음인, 2007)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주헌, 학고재, 2006)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헨리 나웬, 분도출판사, 1989)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