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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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6.12.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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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7: 하느님 나라와 교회

마태오 복음서 13장과 18장을 보면 하느님 나라와 교회에 관한 내용이 길게 나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 장면들을 잘 보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과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느님 나라, 영적 변화에서 사회구조의 변화로 나아간다

13장에는 하늘의 왕국에 관한 일곱 가지 다른 비유들이 있다. 첫째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많은 사람들 마음에 뿌려진 씨앗으로 말씀하시고 다만 그 씨앗이 그들 마음 속에서 자라게 하는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다고 말씀하신다.(마태오 13,4-9).

두 번째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비록 하느님은 그 차이를 아시지만, 우리는 누가 그 나라에 있고 누가 없는지를 늘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마태오 13,24-30). 이 비유들은 하느님나라가 정신적인 현실이지 어떤 조직적인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는 한 사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퍼져 나가며 자란다. 그것은 단체, 사회에 파고들고 영향을 미친다. 셋째, 넷째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지들을 뻗어 나가는 나무 같고, 반죽에 파고드는 누룩 같이 늘 구조에 스며들고 구조를 형성하며 변형시킨다고 말씀하신다(마태오 13,31-33).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을 그것들의 바로 중심으로부터 어루만지고 영감을 주며 생기를 주는 어떤 것이며, 그래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사진=한상봉

진주를 발견한 사람들

그 다음에 나오는 두 개의 비유는 제일 짧은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이 비유에서는 사람들이 하느님나라를 찾았을 때 그 나라를 알아 볼 수 있으며, 그 나라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많은 것들을 기꺼이 포기한다고 알려준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안전하게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오13,44-46)

나는 현대에 많은 사람들이 삶을 나누고 하느님 나라를 찾기 위해 자기 안전을 버린 많은 예들을 생각할 수 있다: 기도 모임, 정의 평화의 직분, 사회 활동단체, 쉼터, 선교그룹, 활동과 관상의 공동체들. 예를 들어 신시네티에 있는 뉴 예루살렘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여행가방에 넣어 다닐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미국 전역에서 왔다. 

가족들은 교외에 있는 좋은 집을 팔았고, 가난한 이웃들 속에서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집을 바꾼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재산을 포기할만한 무엇을 뉴 예루살렘에서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진주를 발견했고 그것의 진가를 알았다. 하느님 나라에 산다는 것은 영적인 것일 수 있으나, 그것은 또한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그것을 발견하면 아주 매력적이다.

교회에 등록한다고 자동으로 하느님 나라 시민 되는 것 아냐...

일곱 개중 가장 마지막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영적인 현실이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그 안에 있으며 누가 그곳에 없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다(마태오 13,47-50). 어느 기도 모임도, 어느 본당도 완전하지 않다. 뉴 예루살렘도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늘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약하고, 죄가 많으며 그 가치를 다시 발견하기 위하여 또다시 회심을 해야하는 사람들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잘못된 이유로 우리 공동체에 오며 회심을 거부하는데, 이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삶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종종 편리하기 때문에 본당에 소속된다. 교회에 등록한다고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여러분은 자신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기를”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당신은 다음 순간에 “내 왕국은 갑니다(Out!)”라고 말해야 한다.

사진=한상봉

하느님과 나눈 통교의 힘...고독과 기도 속에서

14장에서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 즉 아버지 하느님과 통교하고 계시며, 하느님의 주권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권능과 교제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군중을 돌려 보내셨다.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 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마태오 14,22-23)

행동 지향적인 사람들은 왜 예수께서 이렇게 하시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가끔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그 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시고, 자기 혼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이 보이므로 사람들은 이점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사는 힘, 하느님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힘이 하느님과의 일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 관계를 갖게되면 여러분은 기적을 행할 수 있다.

흔들리는 배, 예수 없는 교회

이것을 마태오가 다음에서 보여준다. 제자들은 호수가로 나간다. 그리고 주님 없이 그들은 어려운 시간을 갖게 된다:

"그 동안에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마태오14,24-25)

제자들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을 말한다. 배는 공동체, 교회 등 그들 주위에 있는 외부적인 구조를 말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없으면 그 배는 이리 저리 흔들린다. 종종 교회가 산산조각이 나서 가라앉을 것 같이 보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구조하려고 온갖 방법, 온갖 프로그램, 온갖 전략을 다 동원한다. 그들은 필사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힘은 어디에 있나? 예수께서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 그래서 풍랑 속에서 그들을 만나기 위해 걸어오신다. 처음에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하며 소리를 질렀다."(마태오 14,26)

마태오는 여기서 부활 이후 예수가 교회에 현존하시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영적인 현존이나 또한 실제적인 현존이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가 아주 절망적일 때, 일들이 주님 없이 엉망이 되어 갈 때, 그 분은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이 주님이라고 믿지를 못한다. 그것은 그 분이 거기 계시지만, 안 계신 것과 같기도 하다. 그분을 보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그 분이 정말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주님으로부터의 재확신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오 14,27)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분은 성서에서 여러번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의심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시면서 그 분의 현존을 알리신다. 일단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깨닫게 되면 두려워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진=한상봉

주님에게서 눈을 뗄 때마다 불가능은 다시 불가능해진다

신앙과 두려움은 양극단이다. 그것들은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행동을 한다: 말하기 슬픈 일이지만 경쟁자들에게 대한 두려움, 돈을 많이 벌지 못 할 것이란 두려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 할 지에 대한 걱정, 다른 나라에 대한 두려움, 교회에 대한 두려움, 하느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행동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의 바탕 위에서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권능,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보증 위에 서는 것을 말한다. 신앙이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고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 할 때 우리는 신앙 안으로 걸어 들어 갈 준비가 된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마태오 14,28-29)

예수께서 하신 말은 단지: “오너라”이다. 그것은 일생의 부르심이며,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부르심이다. 베드로는 그를 붙잡아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므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주님으로부터 단 한 마디만 필요했을 뿐이다. 그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했다. 그는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가능했던 것 한 가지만 했다. 그는 주님께 눈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 그는 적어도 한동안은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베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마태오 14,30-32)

우리가 주님에게서 눈을 뗄 때마다 불가능은 다시 불가능해 진다. 그러면 우리는 불가능 해 보이는 것을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시 침몰하기 시작하고 그 사실을 안다. 우리가 처한 위험에 대해 걱정하면서 우리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럴 때 세상에서 흔히 이용되는 기도를 한다: “주님 도와 주세요!”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것은 단지 믿음이다. 그 분은 단지 우리의 눈을 그분에게 고정시키고, 그 분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나서 주님의 손을 잡으면, 우리는 일어나서 다시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하려 들면 모두 흠뻑 젖을 것이다. 또 베드로처럼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리석게도 약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에 만일 우리가 운 좋게도 그런 경험을 하게되고 거기서 교훈을 얻게 되면 신앙의 진짜 의미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누가 주님이시며 왜 그 분이 주님이신 가를 배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만이 아니라 항상 그 분이 우리를 지탱하시도록 할 준비가 된다. 우리는 그 분을 우리 주님으로 모실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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