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는 나환자를 포옹하고 돌과 음식을 구걸할 때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는 결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주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성 글라라는 관상의 가난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도 삶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글라라에게 있어 가난과 관상은 너무도 심오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관상은 가난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선 오로지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시고 주시기 때문이다.
그녀가 편지들 중의 하나에서 쓰듯이, 얼마나 갸륵한 교환인가, 영원한 것을 위하여 일시적인 것들을 떠나고, 지상의 재화 대신 천상의 것들을 선택하고, 하나 대신에 백 배를 받고, 축복 받고 영원한 생명을 갖는 것이.
프란치스코에게처럼 글라라의 가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데, 왜냐하면 하느님 왕국을 현재화시키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하신 그 분을 열렬히 갈망하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선하신 주님께서 동정녀의 태내로 들어오신 이래로 이 세상 안에서 멸시받고, 도움을 필요로 하고, 가난하게 보이기로 선택하셨기에, 비참한 가난과 결핍과 절대적으로 천상 음식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하늘 왕국을 소유함으로써 그분 안에서 부유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은 기쁨에 넘치고 만족하게 될 것이다!
글라라가 황홀하게 쳐다보고 생각하고 관상하려고 결정한 분은 항상 가난하신 그리스도인데, 왜냐하면 그 분은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우리가 관상해야 할 거울이시기 때문이다.
이 거울이라는 이미지는 성 글라라의 영성에 중심적이다.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거울이었고 그리스도가 성부의 거울이었기에, 관상가의 삶은 그리스도이신 거울 속을 드려다 보아야 하며 거기에서 그 자신을 보는데, 그럼으로써 당신이 누구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거울 속을 바라보고 당신 자신을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당신이 관상하는 그 분의 거울이 되고, 이어 당신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로 모든 피조물을 반영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거울 속에서 그리고 거울로서 보게 된다.
성 글라라는 그녀의 자매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주님이신 그분 자신께서는 우리들을 다른 이들의 표양과 거울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부르신 같은 자매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들도 이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표양과 거울이 될 것이다."
이 복잡한 이미지들은 성서와 교부들의 문헌,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서정시들에 대한 성 글라라의 깊은 지식을 보여 주는데, 이 모든 것들은 거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12세기의 유명한 오비드의 나르시소스(수선화) 이야기에서 한 음유시인은 자신의 나르시소스를 갖고 있어서 물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가 다른 것을 인식하고서 자신의 분리된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성 글라라와 같은 관상가에게 자각을 통한 자의식의 탄생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자신을 봄으로써 진실한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가 더욱 완벽하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추게 될수록, 그녀는 실제가 되어간다. 그녀는 프라하의 아녜스 복자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비전은 영원한 영광의 광채이며 영원한 빛의 빛남이고 흠이 없는 거울이기 때문에, 매일 그 거울을 바라보시오, 오 예수그리스도의 여왕이며 배우자여, 그리고 항구하게 당신의 모습을 그 안에서 연마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아름다운 의복을 안과 밖으로 입게 되며 꽃과 모든 덕의 옷으로 덮일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가장 지고하신 왕의 딸과 가장 정결한 신부가 됩니다. 진정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그 거울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당신은 그 모든 거울을 통해서 그것들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 모든 거울을 포함하기 위하여 그녀의 이미지들을 확장시킨다:
"이 거울의 가장자리들을 보시오. 그리고 외양간에 누이고 강보에 쌓인 그 분의 가난을 보시오. 그런 다음 그 거울의 표면을 보면서, 거룩한 겸손과 복된 가난과 그분께서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 참아 견디신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고와 짐들 위에 거하시오. 그리고 그 거울의 깊은 중심 안에서 그분이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 당하시고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도록 이끈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관상하시오. 그러므로 십자가 나무 위에 매달린 그 거울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여, 나의 수난과 같은 수난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보시오.' ”
이러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대면시키는 가장 충격적인 실재는 하느님의 가난이다. 가난하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으뜸가는 이미지이시다! 하느님은 가난하시며, 하느님은 자신을 비우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난 속에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닮아가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거울들이 된다.
하지만 가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삼위일체와 예수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그 거울을 관상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이미지로 변형되어 가는 길일 따름이다. 거울은 물질이지만 비물질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처럼 가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적이고 볼 수 있는 분이지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되는데, 그분은 충만히 채우시는 동시에 자신을 비우시는 삼위일체 속에서 가난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성 글라라가 삶의 방식으로서 관상과 가난을 그토록 집요하게 붙잡은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두 가지는 하나이며, 가난에 대한 관상은 관상이라는 가난이 되어간다.
<출처> 머레이 보도의 <성 프란치스꼬의 길-모든 이에게 도전하는 프란치스꼬의 영성>, 참사람되어 2002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