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기도3: 우리가 지어낸 부적절한 하느님 죽이기
상태바
[프란치스코] 기도3: 우리가 지어낸 부적절한 하느님 죽이기
  • 머레이 보도
  • 승인 2016.11.23 0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13살 이후부터 기도하려고 노력해 왔다. 어떤 때엔 기도가 잘 되었으나, 어떤 때엔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기도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나 무능력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나의 일상 생활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나의 지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내가 기도 중에 어려움을 체험하기 시작할 때는 보통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나의 현재의 이해를 허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거나 떠오르는 새로운 이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만일 내가 그렇게 되어야 할 어떤 이상적인 모습들에 매달리고 태어나기 위하여 버둥거리는 내자신의 다른 면을 부정한다면, 그때 나는 진짜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고 있었던 하느님은 더 이상 진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 하느님은 지금 죽어 가는 나의 이상화한 측면으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상화된 자아가 죽으면 그 자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와 일치하는 신성에 대한 필요로부터 형성된 부적절한 하느님도 죽는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내 자신의 모든 측면들을 포용함으로써 나 자신을 성장케 하고 형성시킬 때 하느님은 다시 가까이 하기 쉬운 분이 되는데, 왜냐하면 진실한 하느님께선 오직 내가 되길 원하는 나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고 긍정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의 진실에 대한 받아들임은 하느님에 관한 진실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그 두 진실들은 그 사람의 기도하는 중심에서 하나가 된다.

진실한 기도는 나 자신에게 대해 정직함을 요구하는데, 하느님과 대화 할 수 있는 “나”는 오직 통합된 자아만이 기도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 자신에게 정직함이 내가 올바로 기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기도할 수 있기 전에 “가치 있고”, “완벽하고”, “거룩하게”될 필요가 있다면, 나는 아마도 전혀 기도하지 못하거나, 설사 내가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 기도는 하느님과 하는 것이라기 보다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자기만족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정직하고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자아가 되지 않을 때에,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상화된 자아는 항상 기도 중에서 죽는데, 왜냐하면 그 자아는 진실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자아를 죽게 놔두고 되어 가는 자로서 기도한다면, 우리가 가진 하느님의 이미지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더 선명하게 이해함에 따라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도도 변한다. 그래서 모든 선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배로부터 내가 고통당하게 허용하거나 어떤 이유 때문에 나를 방치하는 부당한 하느님께 불평을 내뱉거나 말다툼하는 기도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나를 저버리시는 분으로서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그분이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분이신가를 말한다면 나는 거짓말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내가 그분을 객관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으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하면서도, 그분을 주관적으로 체험하면서 그분께 기도할 때에 비로소 객관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된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느님은 그분이 어떤 존재이신가에 대한 나의 정직하지만 잘못된 표현과 이해를 되잡아주고 고쳐주시기 때문이다.

사진=김용길

나는 하느님과의 이러한 정직한 씨름이 프란치스코가 회심의 시작에 동굴에서 보낸 고통스러운 한 해와 일생동안의 다른 때에 경험한 것이며, <태양 형제의 찬가>란 노래를 만들기 전에 있었던 50일 동안의 암흑기에 그 씨름이 절정에 달했었다고 믿는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고 내쳐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참으로 느꼈던 것을 기도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있는 자로서의 당신자신에게 신실하시고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다는 것을 프란치스코에게 보여 주셨고, 비록 그 시간에 우리가 그분을 다르게 경험하더라도 충실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의심과 절망과 하느님의 불충실을 실제로 경험한대로 인정할 만큼 정직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의 중심에 계신 진실한 하느님이 프란치스코의 인식의 진실성을 인정해주기 위하여 다시 프란치스코의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선 그를 버리셨는데, 그가 다시 한번 하느님께 그의 지배 밖에서 독립적으로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는 특권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당신 자신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순수한 선물이며,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완벽한” 인간이 됨으로써 얻거나 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일 뿐이며,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완전함이나 성취는 전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하느님이 우리의 정직한 기도에 자유로이 응답하시며 우리 안에서 바꾸시는 그분의 작품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게 되면 그때는 하느님의 일이지 어떤 이상과 일치되는 우리자신의 성공이 아닌 것이다. 진실한 기도 속에서 변화되는 자아는 우리가 계획했던 자아와 일치되는 때가 거의 없고, 이제는 우리가 빗나간 우리 자신의 이상주의의 작품으로 자각하고 있는 잘못된 자아를 하느님께서 점차적으로 해방시키셔서 만드시는 새롭고도 불가사이한 자아인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자신의 진실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해주신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진실한 얼굴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의 영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출처> 머레이 보도의 <성 프란치스꼬의 길-모든 이에게 도전하는 프란치스꼬의 영성>, 참사람되어 2002년 3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