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장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묻는 장면을 바라보면, 과연 이 율법 학자가 정말로 궁금해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 의심하게 된다.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을 마치고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의 행보는 유다인의 전통에 반하는 파격 그 자체였기 때문에,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율법 학자는 자신에게 불편한 존재, 곧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첫째 가는 계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어떤 면에서 매우 교과서적인 대답이다. 만약 예수님의 대답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행위를 정당화 하거나, 유다인들이 죄인이라고 부정하게 생각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자는 식의 내용이었다면 율법 학자는 예수님이 함정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질문들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의도를 간파하고 함정에 걸려 들지 않으셨다.
마르코 복음을 포함해서 공관 복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장면은 너무나 유명해서 사실 별다른 말이 필요 없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요, 둘째 계명은 이웃사랑이라고 말씀을 하셨으니, 이 말씀에 어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겠는가. 아주 고전적인 관점에서 이 대목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수직적 관계 그리고 나와 내 이웃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 안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한편 조금 더 발전적인 관점에서 이 대목은 나와 내 이웃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망가트릴 수 있는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율법 학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예수님의 얼굴 표정은 어땠을까 상상을 해본다. 율법 학자를 경멸하는 표정이었을까, 아니면 화가 난 표정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예수님은 살짝 웃으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지었을 것 같다. 그 표정을 바라봤을 율법 학자는 조용히 물러가진 않았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번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대답에 동의했다. 그런데 율법 학자가 동의한 이웃사랑의 이웃은 어떤 모습일지 쉽게 상상은 간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살짝 웃으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활 동안 함께 한 이웃들을 보자.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과 스스럼 없이 빵을 나누며 식사를 했고 (마태 9,9-13 참조),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자 안식일의 규율을 어겼다 (루카 6,6-11 참조). 예수님이 함께 하신 이웃은 율법 학자의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우리 사회나 교회 공동체 안에 율법 학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죄를 지었기 때문에 결코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없을까? 있다. 아주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 죄를 지었다고 손가락질 받는 소수자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주민들과 난민들, 성소수자들, 그리고 배운 것 없어 무식하다고 여겨지는 노동자들.
탈종교 시대에 아직도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써 첫째 계명을 어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이제 우리에게 남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뿐이다. 오늘의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이 둘째 계명을 나에게 일러주신다고 생각하고, 과연 예수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씀하실지 예수님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각자 나의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단죄하거나 애써 외면해온 이웃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바로 이러할 것이다. 나의 이웃이 아니라고 혐오하고 차별하였던,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기꺼이 함께 하며 빵을 나누었을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전수(라파엘)
천주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