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이 처한 문맥상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을 먹이신 이야기(참조. 마르 6,30-34) 뒤에 이어지는 마르코복음 7장의 서두로 오늘 복음은 전개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일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제기하는 논쟁에 맞닥뜨리신다.
1.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 왔다가…”(마르 7,1)로 시작한다. 소위 ‘예수 관련 사건 진상 규명단’이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에 관련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도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파견된 무리이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논쟁을 통해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행위를 두고 “베엘제불이 들렸다”거나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라고 이미 판정하고 예수님을 비난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이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서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공격하려 든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2)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마르 7,3-4)
이른바 할라카(Halakha, 히브리어: הֲלָכָה)라고 알려지는 유다인들의 포괄적인 종교 관련 법규와 전통(하가다Haggadah, 라삐들의 율법 외에 대한 해석)이다. 오늘 문제가 된 것은 불결한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이러한 규정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의 율법인 토라에서 사제들과 그 후손들이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갈 때나 제단에 다가갈 때 지켜야 할 규정이었다.(참조. 탈출 30,17-21) 그런데 이러한 규정에 대해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러 급진적이고도 과도하게 율법을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특별히 순수나 정결에 관해 거의 집착에 가까운 반응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불결한 사물들과 접촉하여 생겼을지도 모르는 불순을 손 씻기나 몸을 씻는 행위, 그리고 사물을 닦아 정갈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적이고 율법 학자들과 같은 사람을 오늘날에 견주어 묘사하여 본다면, 신학자와 법학자를 겸비한 전문 종교인이면서 행실은 별로인 사람 정도가 된다. 또한, 종교적인 열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고, 매우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이며, 매주 주일 미사에도 꼬박꼬박 참여하는 모범신자인 것처럼 보이고, 사회적으로도 모범적인 시민처럼 보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이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우리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에 찬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의로움과 행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의 포로가 되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거침없이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2. “너희 위선자들…너희가 전하는 전통”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인 행위를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마르 7,6) 하시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6-7 참조. 이사 29,13) 하시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대답하시면서 질문하는 이들을 “너희 위선자들”이라 하신다.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을 명하는 이들에게 성경을 이용하고 해석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권위로 대답하시고, 제자들을 간접적으로 옹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고, 소위 종교적이라고 자처하는 종교인들이 제멋대로 상상하여 만들어낸 인간적 규범이라는 것을 구분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이들의 작태를 고발하신다.
“너희 위선자들”이라 하시는데, “위선자”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의 연극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말로서, “위선”이 동사로 쓰일 때는 ‘to play a part(역할을 하다, 연기하다, 출연하다)’ 혹은 ‘to make believe(믿게 하다)’의 뜻을 지니고, 명사일 때에는 ‘pretender(~인 체하는 사람)’나 ‘dissembler(위선자, 가면 쓴 사람)’를 뜻한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죄는 ① 교만, ② 외형만의 도덕성과 고결함의 추구, ③ 자기들의 그릇된 신념체계를 타인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모든 것은 스승이 아닌 자가 스승의 행세를 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한 마디로 “위선자들”이라 하신다. 바리사이적인 교만은 자신의 무능함을 수긍하려 들지 못하고, 자신의 왜소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의 적나라한 실체를 직면하지 못한다. 인간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때만, 즉 겸손하게 자신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 놓을 때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한없는 자애를 체험할 수 있다. 인간의 미소함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는 종교가 곧 그리스도교이다. 그런 의미로 겸손이 없이는 참 진리가 있을 수 없고, 참 진리 없이는 겸손도 있을 수 없다. 예수님에게 죄는 씻은 손이나 씻지 않은 손이 아니며, 불결하거나 정결한 음식의 구별이 아니고, 인간 정신이 그릇된 길로 접어드는 것이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의 얼굴을 담지 못한 것이었다.
법과 규범은 시간이 흐르면서 법을 제정했던 원래의 취지와 뜻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법과 규범 자체에 옭아 매이도록 하는 속성을 지닌다. 말씀의 원래 뜻을 곡해하고, 그 곡해로 자기의 삶을 자해하는 그릇된 믿음과 같은 위험이다. ‘전통’을 고수한다고 하는 이들이 말하는 전통이 때로는 자기들이 생각하고 만들어낸 자기 고수일 경우가 많다. 특별히 종교적 전통 안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을 떠나 자칫하면 스스로 소외되고,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옭아매며, 장벽을 쌓거나 인간 사이에 경계를 짓는 것이 되고 만다.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대답하신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하여서 했던 말을 확인하시면서 하느님을 입술로만 공경하고 마음으로는 공경하지 않는 위선을 책망하신다. 말이 가깝고 마음이 먼 모습을 나무라신다. 당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분명히 자주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에 갔을 것이며, 부지런히 전례에 참석했을 것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일에 열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입으로 고백하는 바를 몸으로 살지 못하고 있었음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다. “저마다 제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간사한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합니다.”(시편 12,3) 하는 시편 말씀처럼 갈라진 마음이 아니라 “두 마음”인 것을 꾸짖으신다. 부정적인 현대말로 ‘다중인격’이랄까?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13)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지적은 상당히 아픈 말씀이다. 많은 경우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하느님의 뜻이 왜곡되고, 인간들의 편의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취해지며, 스스로 이율배반이 되고, 전통이 최우선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 자체를 폐기해 버린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도 거듭하여 식별이 요구된다. 이 식별은 복음적 가치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만이 기준이다. 그러한 기준에 따라 지어지는 인간 행위의 궁극적 지향은 선善이고 애덕이며 사랑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2세기의 위대한 수도승이었던 스텔라의 이사악Isaac of Stella(1100~1170년)이라는 교부는 "교회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마지막까지 지켜져야 할 기준은 항상 아가페agápe요 사랑carità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고 부정하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식별’을 통하여 항상 율법 제정자이신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셨으며, 수많은 예언자가 말한 대로 하느님의 법이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이 온전한 자유로 이를 실천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기를 바라셨다. 율법과 전통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위선을 낳으며 잘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 자체를 항상 담고 있다. 전통은 문화와 세대의 변화를 겪게 마련이지만, 또 전통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을 만하기도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1베드 1,25 참조. 이사 40,8) 한 그대로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니 주님 말씀의 은총이 주는 옷을 덧입어야만 한다.
3.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오늘 복음에서는 건너뛰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통”과 “계명”에 관한 몇 마디 말씀을 더 이어가신다.(참조. 마르 7,10-13)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마르 7,14)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마르 7,15) 하시고,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하신다. 이 말씀에 이어 일부 수사본에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7,16)라는 구절이 있다고 성경은 알려준다. 짧지만 강하고 엄중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모든 인간에게 외면과 내면, 겉과 속이라는 두 차원이 있지만, 그 두 차원이 별개인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창세 4,7)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하듯이 인간의 안과 밖을 구분하시면서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이 하나되어 “옳게” 살라 하신다.
많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무척 신경 쓰는 겉치레 삶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상당히 거슬리는 말씀이다. 제자들 역시 뜨끔했을 말이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집에 돌아와 그 말씀의 뜻을 여쭤보자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7,18) 하시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일일이 “안에서” 나오는 것들을 거론하시며 대답해주신다. 몇 구절을 건너뛰어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은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총 12가지의 죄악 목록을 담은 “나쁜 생각들”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나 밖의 이웃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죄악들이다. 내 마음이 불결하고 더러워서 생겨난 “나쁜 생각들”, 곧 죄악들은 내 안에 머물러 나를 더럽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나로부터 뛰쳐나가 타인을 더럽히고 망치며 해친다. 복음서에는 죄악의 목록이 여기서만 등장한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갈라 5,19-21. 참조 : 1코린 5,10-11 2코린 12,20-21 로마 1,29-31)이라 하고, 바오로 학파 역시 해외 유다교에서 죄악의 목록을 자주 열거한다.(참조. 콜로 3,5-8 에페 5,3-5 1티모 1,9-10 2티모 3,2-5) 사랑을 거슬러 짓는 죄요 이웃을 거슬러 짓는 죄로 종합이 가능하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최후의 심판에서는 죄가 우리 각자와 타인과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마태 25,31-46)
신앙인은 끊임없이 “나쁜 생각들”을 경계하며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시편 51,4) 하고 기도해야 한다. 내 마음에서 생기는 나쁜 생각들을 없애려 노력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끌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나쁜 생각들”이란 그저 마귀가 불어넣은 것일 뿐 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주는 답은 이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고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성 베다 AC 672/673~735년)』 하느님의 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며 성실과 충실이다. 불순과 악은 지상의 현실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이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 내면에 있다. “마음”은 도덕적 결정이 내려지는 자리요 양심이 사는 자리이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위한 인간일지(순명하는 존재일지) 아니면 그에 반反하는 인간일지(불순명하는 존재일지)를 결정하는 자리요 다른 인간들에 의해서 ‘나’라는 존재가 증명되는 자리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비유로 들어 몸의 안과 밖,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말씀하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먹고 마시는 자리, 궁극적으로 우리 성찬의 식탁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나 자신만을 생각하면 그것이 죄로 이어지듯이 주님의 식탁에서 나만을 생각하고 우리만을 생각하면 죄로 이어진다. 아무도, 설령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식탁에서 그를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의 식탁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식탁에서는 우리가 모두 죄인이고 주님의 몸과 피를 구걸하는 자들일 수밖에 없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9) 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이다. 주님의 식탁에는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보잘것없는 이들, 존엄성이 훼손된 이들 모두가 형제요 자매로 함께 앉는다. 아멘!
[출처] benji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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