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쓰레기 분리배출일은 매주 월요일이다. 종이류와 플라스틱, 유리병과 캔류 그리고 비닐을 나눈다. 재활용이 안되는 물건은 쓰레기 봉투에 버린다. 매주 놀라는 것은 매주 나오는 어마어마한 쓰레기의 양이다. 명절이 지난 주는 '쓰레기산'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분리배출을 잘한다고 손가락 관절이 안좋은데도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떼느라 진을 빼고 비닐에 붙은 이물질을 깨끗이 씻어서 배출하느라 오히려 물낭비가 심하다. 장황하게 '모범적인' 분리배출을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8월 가톨릭일꾼 월례미사 후에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의 저자 이송희일의 강의를 듣고 충격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송희일은 이름부터가 남다른데 부모님의 성을 쓰고 희일이 이름이란다. 페북에서는 '29세의 미남'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는데 29세는 '희망나이'인 것같고 '미남'까지는 아니고 눈매가 선한 사람이었다. 독립영화 감독을 20년 이상 하고 있는데 우연한 계기로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책까지 쓰게 되었단다. 저자는 본인이 전공도 아니고 공부가 모자란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50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문헌을 치열하게 읽었다. 그것도 외국어 문헌을. 나는 저자의 강의를 듣고 현장에서 책을 구입하고 사인을 받았기에 이 글은 독후감이 아닌, 순전히 강의를 바탕으로 들은 내용과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것, 그리고 놀라고 분노하게 된 지점을 쓴 것이다.
저자는 "여기 계신 여러분이 죽기 전에 보게 될 두 가지는 인천공항이 가라 앉는 것, 부산 마린시티가 한시적으로 물에 잠기는 것"이라며 우리를 놀라게 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한 번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계속 지구에 남아서 어딘가에 흡수되지 않으면 대기 중에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극한적 홍수, 극한적 폭염과 가뭄, 이 모든 것이 이산화탄소 때문이다. 2023년에 일어난 산불의 1/4이 캐나다에서 발생했다. 나무는 '이산화탄소 덩어리'다. 산불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만큼의 탄소를 배출한다는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무엇때문에 이렇게 지구의 기온이 비정상적으로 깨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산업혁명' 때부터 자본주의가 페달을 밟으면서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부터 갑자기 더 가파르게 상승한 이유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로의 산업 '외주화'가 원인이다. COP29(세계 기후위기 지구 정상 회담)가 매년 열리지만 2023년 이산화탄소 배출은 정점을 찍었고, 2024년 7월 22일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 그런데도 네덜란드의 기후지킴이 '그레타 툰베리' 말처럼 "우리는 지금 씨부렁거리고만 있다"는 것이다. 산업화 대비 지구의 기온을 금세기 말까지 1.5도C 상승을 끊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1.5도C는 벌써 끝나버렸다.
이산화탄소 배출의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는 화석연료, 즉 석탄, 석유, 천연가스의 사용이 원인이다. 둘째는 '토지 이용 변용'이다. 열대우림을 벌초하고 태우는 것이다. 거기서 어마어마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열대우림을 베는 이유는 인간들이 소고기를 먹기 위해서 '소'에게 먹일 엄청난 양의 '대두'를 그곳에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친환경농법이 아닌 화석연료를 이용한 '자본주의 농법'이다. '육식행성'을 만드는 것이다. 온실가스의 1/3은 토지이용 변용이 주범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후불평등'이다. 지구 온실가스의 대부분이 북반구, 즉 잘사는 나라에서 흘러나온다. 기후위기에 취약지구는 남반구다. 사진상으로 정확히 겹친다. 이산화탄소를 미미하게 배출한 남반부 사람들은 분노한다. 온두라스, 과테말라는 5개국이 합해서 0.4% 밖에 배출하지 않았는데 가뭄과 허리케인으로 식량위기에 내몰려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기후위기를 말라기 전에 기후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기후정의'는 남반구에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도시와 농촌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농촌이 도시보다 기후위기를 4배나 더 체감한다. 노동자, 청소년, 태어날 후손들은 그들이 누려야 할 기후환경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다 뺏겨버렸다. 기후정의의 관점이 필요한 지점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가장 놀라고 분노한 부분은 이름도 생소한 '호랑이 과부' 이야기다. 뱅골만은 엄청난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는데 해수면 상승이 되면서 염분때문에 농사도 못짓고 식량위기가 오니까 가장들이 순데르반스(아름다운 숲)라는 멸종위기의 '뱅골만 호랑이 보호지역'으로 몰래 들어갔다가 잡아먹히고, 먹이사슬이 깨져 굶주린 호랑이들은 민가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잡아먹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비극이 탄소배출 0.001% 를 배출하는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기후재난은 순수하게 기후에만 관계된 재난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재난'이고 '가부장제의 재난'이다. 하와이 산불 재난은 유럽의 식민주의가 '관광산업'을 목적으로 지구의 경관과 생태계를 바꾸면서 선주민들과 자연을 어떻게 수탈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기후재난은 순수한 기후 재난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식민주의를 거치면서 일어난 재난이다.
또 하나 놀란 것은 전세계 산사태의 1/4은 우리가 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겪은 나라들에서 산사태가 발생하는데 그 원인은 녹차, 홍차때문이다. 유럽에서 시작한 자본주의가 식민지를 시작하면서 돈을 벌기위해 대량으로 추출하기 위해 기본적인 자연 생태계를 뜯어고친 것이다. 칠레에 산불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데 그 원인은 '유칼립투스' 때문이란다. 신자유주의를 가장 먼저 이식시킨 곳이 칠레인데 임업을 키우려고 빨리 자라는 유칼립투스를 심는다. 호주가 원산지인 유칼립투스는 불과 함께 진화한 종으로 불이 나면 더 많이 퍼지고 오일을 품고 있는 '화약고'다. 그러면 파괴적인 산불을 일으킨 방화범은 누구일까? '자본주의'다.
나바우 족의 문장에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지만 잠든 척 하는 사람은 깨울수 없다"는 말이 있단다. 소름끼치게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탄소발자국' 이라는 것도 영국의 세계 석유회사에서 만든 플랜이라고 한다. 시민들이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 분리수거만 잘하면 기후위기가 해결될 것처럼 만하는 것이다. 정작 기후위기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기업들이 초래하는데 시민드렝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이고, 그래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불안 심리를 이용해서 기후위기의 실재와 대면하지 못하게 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다. 착한 소비와 윤리와 미덕으로 세계가 붕괴하는 걸 막는다고 합창하고 있다.
이송희일은 상위부자 9%가 31%의 탄소를 배출한단다. 그런데 12%밖에 안되는 배출을 하는 서민들이 머리끄댕이 잡고 분리 배출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인적 실천도 좋지만 기후위기를 덮고 있는 수많은 위선을 걷어내고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압박해서 '탄소세'를 직접세 형식으로 걷어내고, '조세제도'도 뜯어고치는 것이 시급하다.
분리배출을 모범적으로 하는 나로서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기후위기가 심할수록 저소득층. 노인,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난민, 이주민들의 삶이 가장 먼저 위험으로 내몰리고 고통에 시달리니 적극적인 방법으로 연대하고 바꾸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에필로그에 "초유의 행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구를 '탈자본화' 해야 한다. 지구를 지배하는 죽은 자들의 권력을 파묻고 인류의 유일한 원천인 이 지구를 인간과 자연의 공유지로 다시 재영토화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춤을 출 수 없다면 그 곳은 이미 죽은 행성이다." 라는 대목이 감동이다. 그 춤이 만개할 있도록 춤을 출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우리들과 피조물들이 타자와 관계를 맺고 교감하고 함께 살아가보자.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꿈꾸는것, 그것이 '희망' 아니겠는가!
책의 내용이 너무 자세하고 방대해서 직접 책을 사서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믿을 수 없는 살인, 강간, 인신매매 등 자본주의의 끝도 없는 잔악함을 대하고 충격을 받는 분들도 계실 거다. 그래서 더 읽어보시라. 내가 쓴 글은 그저 이 책의 맛보기 정도다. 오는 9월 7일 3번째 기후정의 행진이 열리다고하니 모두 나와서 함께 춤을 춰보는 건 어떨까! 기후위기 역설의 춤을!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