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이 누구에게나 복음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福音)’인 것이 때로 부자들에게는 ‘불길하고 나쁜 소식(凶音)’이 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교황 즉위로 인해 좌불안석할 만한 고위성직자들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안이하고 쾌적한 삶을 누리던 사제들에게도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 자체로 사제생활에 대한 도전이 된다.
“좋은 저녁입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이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고서,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 발코니에서 10만 명의 신자들에게 처음으로 전한 발언이다. 교종은 자신의 교황명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정했으며,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그동안 세계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4년 8월에는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 신자들과 국민들에게 종교지도자에 대한 신선한 감흥을 전해 주고, 교회개혁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즉위하면서 자신의 문장에 ‘miserando atque eligendo, 자비로이 부르시니’라고 적었는데, 그분이 뒤이어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한 것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기억한 말은 브라질 상파울루 명예주교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 입을 맞추며 했던 한마디 말이다.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
교종은 가난한 자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로 살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보인다. 청빈한 삶은 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 즉위 이후 맞이한 첫 성 목요일에는 로마 근교의 청소년 교정시설인 카살 델 마르모 소년원을 찾아가 세족례를 행했다. 교종은 이 자리에서 가련한 소년뿐 아니라, 소녀와 무슬림에게도 세족례를 행했다. 과거 교황들은 도심의 대성당에서 남성들의 발을 씻어 주었으며, 그 대부분이 사제였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행보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아예 교황관저에서 지내기를 거부하고, 콘클라베 기간부터 묵고 있던 바티칸의 카사 산타 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교종이 다른 사제들과 ‘공동으로’ 지내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예수회’라는 수도회 출신인 교종에게 사제들의 공동체 생활은 낯설지 않다.
이러한 교종의 모습은 기존 가톨릭교회의 고위성직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교종조차 이처럼 청빈을 선택하건만, 지역교회 주교나 고위성직자들이 호사를 누리기는 매우 껄끄럽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주님으로 고백해 왔던 예수처럼 적빈(赤貧)으로 살기는 어렵다고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검소하고 단순한 삶이란 누구나 가능하지만 그동안 주교와 고위성직자들이 짐짓 회피해 왔던 성덕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전환 이후로 지난 2천 년 동안 ‘신앙’은 가톨릭교회의 고위성직자들 안에서 수식어에 지나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Pope’를 우리말로 ‘교황’(敎皇)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실 예수의 제자직은 어떤 이유에서도 황제권력과 비등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황을 중국에서는 ‘교종’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법왕’이라고 부르다가 천황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의미로 지금은 ‘교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황’이라 부른다. 교회용어사전에는 ‘교종’이란 호칭도 허용하고 있으나, 상용되지 않는다. 교황은 봉건군주제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권위적인 교계제도와 교회법에 비추어 보면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교황직이 권력이기 보다 ‘봉사’직무로 해석되면서,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된 일부 서적에서 번역가 정한교 등이 1970년대부터 줄곧 ‘교종’이란 표현을 일부러 써 왔다. 그러나 최근 20여 년간 다시 교황이란 호칭이 일반화되었다.
교회직무가 권력이 될 때, 그들의 눈앞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가난한 이들은 증발해 버리기 쉽다. 교회직무는 봉사이며, 당연히 이 봉사의 대상으로 ‘가난한 이들’이 우선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사실상 가난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복음선포의 본질적 측면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