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섹스 얘기가 자주 나온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여러 상대와 수시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섹스를 한다. 카페에서 눈이 마주친 이성과, 일로 만난 파트너와, 처제와, 친구의 애인과, 유부녀와, 유부남과, 때로는 친구와 함께 2:1로... 그들에게 섹스는 사람들이 만나서 악수를 하고 함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잦고 자연스럽다. 아무도, 아무에게도, 순결이나 정절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저자가 너무 잦게 그리고 마치 하찮은 일에 대한 보도기사를 쓰듯 묘사해서일까? 그들의 자유분방한 섹스가 전혀 외설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어쩌면 나의 성적 에너지가 다해서일 수도 있겠다). 다만 궁금했다. 도대체 저들(대부분 파리지앵들)은 일생동안 몇 명의 파트너와 섹스를 할까? 등장인물 중 하나는 어느 식당에 앉아 그동안 자신과 섹스를 했던 여자들의 이름을 적는데, 다 적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녀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소설 첫머리에서 쿤데라는 개별적 인간들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몸짓이 훨씬 더 개인적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사람 수에 비해 몸짓 수가 비교도 안 될 만치 적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 몸짓은 한 개인의 소유로 간주될 수도 없고, 그의 창조물로 간주될 수도 없으며, 그의 도구로 간주될 수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다. 말하자면, 바로 몸짓들이 우리를 사용하며, 우리는 그들의 도구요, 꼭두각시 인형이요, 그들의 화신인 것이다."
이를 섹스와 관련시켜 말하자면, 각 사람이 행하는 섹스는 개별적 의미를 갖기보다는 인간이 행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행하는 몸짓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거다.
그 본능을 종교적 계율을 들먹이며 막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의 모든 첫번째 섹스는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지의 호텔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걸까. 청년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이성친구와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낯설지 않은 시대에 그런 가르침이 효력이 있을까. 결혼이 늦어져서 연애 기간이 늘어나는 청춘남녀에게 (내 딸아이는 결혼 전에 연애기간이 10년이 넘었다) 결혼 전에는 손만 잡고 지내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가르친다고 그 가르침을 이행할 청년들이 몇이나 될까.
대학원 때 교수님 한분이 혼전순결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길래 그 운동이 과연 성경적인지, 그리고 효과가 있는 것인지를 질문해서 그분을 곤란하게 만든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달 <복음과상황> 모임에서도 같은 얘기를 해서 그날 처음으로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 교회 동료 권사 한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적이 있다.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거냐고? 아니다. 내가 생각보다 꽤 보수적인 사람이다. 게다가, 아는 사람들은 아는데, 나의 삶은 거의 수도원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말하는 건, 교회가 되도 않는 일에 에너지 쏟으며 구별되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 꼭 필요한 일, 성경이 입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다. 세속화의 물결이 차고 넘치는 21세기에 교회가 살아갈 길을 찾는 문제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이미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길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갈 길 바쁜 시절에 헛다리 긁느라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지금 교회에서 나오는 말과 주장은 세속의 정치권과 문화권에서 나오는 그것들보다 훨씬 못하다.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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