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에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나의 마지막 에세이집이다. 이젠 약속대로 이야기를 쓰고 싶다. 60부터 이야기를 쓴다고 아내와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올해가 육십이다. 노년에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미똥구멍처럼 살고 싶다고 늘 생각해 왔었다.
이야기는 사람을 치유하고 세계를 재건한다. 이야기는 나를 고향으로 귀환시키는 에너지다. 원고를 보내고나서 그동안 만지작거렸던 ‘어른을 위한 동화’ 몇 편을 주물럭거린다. 그 중 손이 가는 놈 두 편을 골라서 일부분을 살짝 던져본다.
“지구에 낭만이 사라지면 무슨 재미로 살까.
그곳은 낭만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행성이지.
무량(無量)한 우주에서
개똥벌레처럼 형광 색으로 깜빡이는 행성 때문에
우리는 어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
지구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지나는 곳,
천오백 광년 거리의 말머리성운에서 우리는 보았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점 하나,
초록빛을 내는 그 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그 행성이 황홀한 빛을 내는 것은
사람들에게 낭만이 있기 때문이야.
사랑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환희에 찬,
그들의 삶에서 황홀한 빛이 나오는 거야.
사람이 죽을 때는 낭만이 소진될 때지.
우리가 광대한 우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저 행성에 출렁이는 낭만 때문이야.
저 행성에서 낭만이 고갈되기 전에
우리 중 몇은 저 행성으로 이주해야 돼.
저기서 인간으로 잠시 살다 오면 되는 거야.
시인으로, 노래하는 사람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인간으로 잠시 머물면서
그들 안에 낭만의 물줄기가 그치지 않도록
한 생애를 살다 오면 되는 거야.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지구에서의 한 생애는
못대가리를 내리친 망치가 일으킨 불꽃 같은 거지.
이번엔 네 차례야.
가라, 지구로.”
(‘가라, 지구로’ 일부)
“인간은 삶이 지루해질 때 가끔 전쟁을 한다.
어린 사내아이가 사타구니를 만지작거리듯
삶이 심심하고 무료할 때,
사내들은 무기를 잡고 싶어 한다.
전쟁은 아직 자라지 못한 사내들의 사타구니 장난 같은 것이다.
전쟁을 좋아하는 남자는
어머니의 젖을 물어보지 못한 자들이다.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생명과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한 어머니를 느껴보지 못한 사내는
정신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들의 정신은 옹망추니가 된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체온과
살 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사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쟁밖에 없다.
이런 사내는 인간성의 불능에 빠진다.
인간성이 발기하지 않는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전쟁밖에 없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성이 비어 있는 자리에 도박판을 깐다.
크게 한 판 이겨서 거금을 거머쥐는 환상은
어머니의 대지에서 젖을 물어보지 못한 자식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다.
오늘도 사내들은 도박을 한다.
어미 없는 자식처럼 서로 치받으며 전쟁을 한다.”
('사타구니 장난' 일부)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