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신학, 피조물과 섞이고 더불어 노니는 행복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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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신학, 피조물과 섞이고 더불어 노니는 행복한 하느님
  • 심광섭
  • 승인 2024.06.0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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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섭 칼럼
Theology in New Animism. God as the beaked and feathered Holy Spirit – the “animal God,” Jesus as an animist,
유기쁨, <애니미즘과 현대세계> 

 

"새로운 애니미즘이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관계적 존재론과 생활방식을 의미한다."(<애니미즘과 현대세계>, 400쪽)

그리스도교 전통에 깊이 묻힌 의식은 하느님을 부리와 깃이 달린 비둘기 성령 곧 동물 하느님으로 표시한 것이다. 여성신학자 샐리 멕페이그는 하느님의 모델에서 하느님을 어머니, 연인, 친구라는 은유로 설명했다. 그러나 동물신학, 뉴애니미즘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다시 동물로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가장 피조물적인 은유를 발견하고 있다. 동물적 존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은유는 만물 속에 인간과 비인간, 인간 이상의 존재 모두에 현존하는 영의 현존을 피력할 수 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 창공으로 날아다녀라’ 하셨다. ...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창세 1,20, 24; 20-25절 참조)

물은 하느님의 말씀을 위임받아 생물을 생성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위임 받아 동물을 생성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너무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계시면서 입으로만 말씀하신 게 아니라 바로 창조된 그 피조물처럼 되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베네치아의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 1519-1594)와 시인 정현종의 통찰이다.

 

틴토레토, <동물의 창조>

하느님은 새와 함께 날고,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며, 개, 토끼, 사슴, 황소 등의 짐승들과 함께 뛰고, 말하자면 춤추면서 생물을 창조하셨다. 창조에서는 매일 150종의 동식물이 멸종하는 환경오염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과정신학이 “하나님은 모든 존재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무한한 사랑으로 응답하는 분입니다.” 하고 어렵고 점잖게 말하기 훨씬 이전에 화가는 하느님을 생물들과 뛰어노는 개구쟁이로 생각했다.

조물주는 만물을 창조할 때
바로 그것들이 되어 그렇게 했다.
새를 창조할 때는
새와 함께 날고
개를 만들 때는
개와 함께 뛰었으며
물고기를 창조할 때는
물고기와 함께 헤엄쳤다
틴토레토의 「동물 창조」에서 보듯이.

-정현종, 「창조」 ―베네치아 시편2 전문

독일의 내로라하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인 지그프리트 안칭어(Siegfried Anzinger)의 「Gott erschafft einen Löwen(하나님이 사자를 창조하다)」라는 2,000년도 작품이다.

지그프리트 안칭어, <하나님이 사자를 창조하다>

엉~~!! 사자가 하나님을 닮다니!

인간만이 하느님을 닮은 게 아니라 사자까지도 하느님을 닮았다. 하느님이 말씀으로 온갖 생물을 창조하셨으니 삼라만상 속에 하느님의 말씀의 흔적이 왜 아니 없겠는가. “하느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음”(로마 1,20)을 새롭게 인식하여 동물에 관하여 말하는 방법을 아는 기독교 신학을 수립해야 한다.

 

<동물신학>(표지)

인간만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거라고 우긴다면, 그건 천덕꾸러기 용어가 된 “인간중심주의”의 또 다른 표현임이 틀림없을 게다. 시인 신현정은 염소가 하느님과 닮았다고 노래한 바 있다.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신현정은 하느님과 놀 수 있는 사람, 아니 하느님에게 놀자고 권면하고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학자들이 하느님에게 지운 무거운 짐을 벗겨주는 이는 시인 밖에 없다. “화내며 잔뜩 부어” 있는 하느님을 끌어내려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염소와 어울리게 하는 ‘동물의 사육제’의 세계와 통한다.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 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 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신현정, <하나님 놀다 가세요> 전문

시인은 하느님에게 “내려 오세요”, “섞이세요” “놀다 가세요”, “서로 부딪치세요”, 하고 말한다. 권위에 찬 종교적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을 포용해 섞이고 더불어 노니는 행복한 하느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를 그린다. 신성모독이라기보다는 세상의 작은 생명과도 같은 자리에 앉아 노닐며 즐기는 모습이지 ‘홀로 거룩하신’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신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천국의 모습이란 연일 찬양의 목소리만이 가득 찬 단성적인 세계가 아니라 세상 만물 모두가 크고 작음을 떠나 두루 평화를 누리는 다채로운 다성적인 세계가 아닐까. 신이 창조의 차원으로 내려와 온갖 피조물과 어울리며 노니는 신의 모습이다. 노닐 때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자재, 자재원융한 존재가 된다.

신과 사물과 생물과 인간이 모두 한데 어울려 놀며 소통하는 세계, 그것은 이사야가 꿈꿨던 세계(판관 11,6-8)이며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한”(판관 11,9)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이다(묵시 21장). 하늘의 놀이(天遊)를 하는 세계, 만물이 모두 생명의 창문을 열고 상통하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세계가 새 창조의 세계이다.

웨슬리의 설교. “보좌에 앉으신 그분은 모든 만물의 모습을 바꾸시고 그의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푼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의 무시무시한 상태는 사라질 것입니다. 새 땅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다른 것을 죽이고 해치며 고통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전갈은 독을 뿜는 침을, 독사는 독을 분비하는 이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잔인함을 사라질 것이며 야만적이고 사나운 기질은 잊힐 것입니다. ... ‘늑대는 양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사자는 양과 함께 놀게 될 것입니다’”(설교 113, “새로운 창조”, 17)

놀이란 경쟁적인 게임들로 이해되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인 항해의 기쁨, 해변 위에서 느끼는 존재의 기쁨, 등산의 기쁨, 먹고 마시는 기쁨, 개인적인 만남의 기쁨, 그 자체가 그에게 제시하는 것을 보고 삶에 통합하는 기쁨이다.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1985)
독일 베텔신학대학(Kirchliche Hochschule Bethel) 신학박사(1991)
(사)한국영성예술협회_예술목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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