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일요일 오후. 한국 게스트들과 컵라면 먹는 문제로 하루 종일 신경을 써야 했다. 하우스 마더 쟌이 며칠 동안 휴가라서 의사소통이 더욱 꼬였다. 마돈나하우스 여자 디렉터 캐시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만 부으면 된다고 설득했다. 매듭을 짓고 일어나려는데 그가 뜻밖의 얘기를 했다.
“은경, 몸이 너무 약한 것 같아요. 마돈나하우스에서 건강이 나빠지는 게스트들이 종종 있는데, 나가는 것이 어떨까요?”
깜짝 놀랐다. 몸이 힘들어 나 스스로도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엄청 갈등을 했다. 하지만 가능한 만큼 이곳 생활을 즐기자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처음엔 힘들었지만 지금은 견딜 만해요.”
나의 대답에 그동안 내가 두 차례 오후시간에 일을 못하고 쉬었던 걸 문제 삼았다.
“아프면 쉴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감기몸살로 열이 펄펄 나거나 눈에 띄게 아프면 쉴 수 있죠. 하지만 은경처럼 몸이 약해서 일상적으로 휴식이 필요한 사람은 여기서 생활하기 어려워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1주일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나쁘다. 내 발로 나가고 싶을 때 떠나는 것과 나가라 해서 가는 것은 너무 다르다. 이 얘기를 듣고 한국인 게스트들도 무척 놀란다. 그런데 내가 그녀의 입장이고 게스트들 전체를 관리해야 하는 위치라면 그럴 법도 하겠다. 마음 편히 받아들이자. 앞으로 남은 4주일 억지로 채우려 하진 말자. “뭐든지 OK, 이만하면 충분하고 고맙다. 그날그날 충실하자.” 이 일로 인해 더 좋은 시간이 열릴 수도 있다. 1주일 후에 나갈지도 모르는데, 이곳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대화해야지. 시간이 많지 않다.
한국의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싱가포르 출신의 스탭
때마침 싱가포르 출신의 필로가 “은경, 네가 얘기하자고 했잖아? 언제 좋아?” 하고 물어왔다.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에는 금융회사에 근무했다는 사람. 열흘 전 “언제 한번 얘기하자”고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영어 때문에 자신이 없고, 일요일이라 좀 쉬고 싶었는데 마다 할 수가 없었다.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필로는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노동자교육을 하는 친구들도 있단다. 은행에서 9년 동안 근무하다가 1993년에 마돈나하우스에 들어왔다. 1999년부터 7년 동안 아프리카 가나의 마돈나하우스 필드하우스에서 일했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참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내게 왜 운동을 그만두었냐고 물었다.
“단순히 노동자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노동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가 중요하죠. 한국에 노동조합운동이 발전하면서 나는 다른 영역에서 할 일을 찾기 위해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작가 일을 했어요.”
내 얘기에 대해 그는 몇 번이나 강조한다. “나 자신이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어요.” 필로가 생각하는 가난. 그것은 마돈나하우스의 단순하고 가난한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마돈나하우스는 100퍼센트 기부로 운영된다. 가톨릭 교구의 지원도 없다. 이곳 스탭들은 의식주 모든 것을 공동체에서 해결한다. 별도의 급여는 전혀 없다. 개인 전화요금, 개인 휴가비는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캐나다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는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하지만 보험이 적용 안 되는 치과, 안경, 카이로 프랙틱 등의 의료비는 개인이 마련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연금을 받는 스탭의 지원으로 의료비를 충당한다. 한국에서 몇몇 공동체를 옆에서 본 적이 있지만, 이토록 강력하게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경우는 보지 못 했다. 그럼에도 여기선 미래에 대한 불안의 기미를 찾아보기 힘들다. 가난해도 풍요로워 보인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남은 기간 관찰해 볼 주제가 생겼다 싶었는데, 나는 오늘 그 해답의 실마리를 보았다.
게스트 숙소 1층 빨래건조실 겸 침구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오리털 침낭을 발견했다. 와. 이젠 자다가 이불 옆으로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깨는 일은 없겠구나. 게다가 이 침낭이 made in Korea. 어느 한국인 게스트가 나중에 필요한 사람을 위해 두고 간 것이다. 누군지 모르는 그녀의 선물이 고맙다. 이렇듯 마돈나하우스에선 찾으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창고에서 기부 물건 분류하는 날
12월 3일(월) 어제 밤 발견한 오리털침낭 안쪽에 면 시트를 대고 자는 느낌이 참 가볍고 따뜻하다. 하지만 내 몸은 말이 아니다. 입안이 온통 부르트고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가니, 눈이 더 소복하게 쌓여 있다. 어쩌면 눈이 이렇게 하염없이 내릴까.
오늘은 더 힘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부물건 분류작업.’ 마돈나하우스의 중고품 가게 (Saint Joseph)는 기부 받은 물건을 한 달에 한번 스탭과 게스트 전원이 모여서 분류한다. 색다른 일에 호기심이 생긴다.
분류작업을 하는 곳은 메인하우스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큰 창고건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신을 실내화를 들고 왔는데 나는 그 얘기를 못 알아들었다. 눈은 계속 펑펑 내리고 한번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옷 갈아입고, 신발 갈아 신고, 장갑도 껴야 하고. 일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다.
창고는 농구장만한 크기. 이곳저곳 작업대가 있고 바닥에 분류를 기다리는 옷, 양말, 핸드백, 가구 등이 쌓여 있다. 중고품가게 디렉터의 지시에 따라 각자 일을 한다. 처음에 나는 큰 통에 든 양말들을 분류했다. 새 것, 쓰던 거지만 괜찮은 것, 버려야 할 것. 다음은 벨트 분류. 이 때만 해도 좀 할 만했는데. 점심 식사 후에는 완전 알짜배기 막노동이다.
특히 판매 불가 판정을 받은 옷들을 큰 비닐봉투에 집어넣는 일. 이게 만만치 않다. 무거운 겨울옷을 옮기고 넣는 것은 물론이고, 부피를 줄이려면 옷 넣을 때 팔과 온몸의 무게로 힘을 줘서 비닐의 공기를 빼야 한다. 한 시간 만에 쓰러지기 직전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고? 이번 1주일 동안 내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보겠다고 했으니. 여기서 원하는 기간만큼 체류하려면 아프단 말을 할 수가 없다.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데, 나의 송곳(?) A가 또 참견을 한다.
“은경, 네가 포장한 비닐봉투에는 공기가 너무 많잖아. 이렇게 눌러서 공기를 빼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지금 있는 힘껏 최고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거거든? 나 좀 봐주라.’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하면서 내 할 일을 했다. 다행히 그때쯤 A가 다른 곳으로 배치됐다. 우와. 감사합니다.
5분의 콰이어트 타임, 강력하다
내 앞에는 계속 작업해야 할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혼자 이걸 다 해야 하나? 마치 내가 ‘콩쥐’가 된 것 같다. 너무 힘들어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다행히 3시 30분부터 30분 동안 휴식시간. 간식을 먹고 나니 좀 회복이 된다. 하지만 실외 화장실도 가야 하고 휴식하는 곳까지 왔다 갔다, 옷 갈아입고 신발 바꿔 신으니 금방 다시 일하는 시간이다.
그래도 정말 달콤했던 시간이 있었다. 딱 5분의 묵언(Quiet Time).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 작업 공간에서 침묵한다. 이 때는 누구도 움직이거나 말을 하면 안 된다. 조금 전까지의 그 분주하고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고요함을 누린다. 커다란 통유리 창문 밖 함박눈을 바라보면서. 60여명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함께 정지하는 장면. 압도적으로 고요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상큼하게 샤워를 한 느낌이다. 단 5분의 시간이 이렇게 강력하다니.
4시 40분쯤 작업이 모두 끝나고, 뒷정리에 청소까지 각 담당파트별로 또다시 업무분담을 해주었다. 여기서 할 일이 없으니 일부는 세탁실로 가고, 나는 주방으로 가라 했다. 주방에 가니 그날 담당은 헝가리에서 이민 왔다는 스탭 B. “뭐 도울 일 없냐”는 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설거지 감을 가리켰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지만 온통 기름 범벅인 네모난 무쇠 오븐에 스텐 냄비까지. 묵묵히 일을 끝냈다.
정말 힘든 날이다. 눈은 계속 내리고. 저녁 미사에 가는 내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도 채플에서 함께 합창하는 아름다운 성가의 멜로디가 나를 위로해준다. 오늘 하루도 잘 지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동시에 목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때는 뿌스띠니아에서 두번째 조용한 휴식과 기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의 영적 상담자 키에렌 신부를 만났다. 나는 이토록 힘이 드는데, 신부님이나 다른 스탭들은 어려움이 없냐고 물었다.
키에렌 신부, 휴식에 대해 조언하다
“처음 내가 게스트로 왔을 땐 27세, 에너지 넘치는 청년이었죠. 그래도 집에서 지내던 거와 다르니 많이 피곤했어요. 그래서 방법을 찾았어요. 기회가 있을 때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법을 터득했어요. 반드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났죠. 때로는 한 발 물러나 아무 것도 안하고 쉬는 것이 필요해요.”
여기에 신부님은 하나를 더 강조한다.
“성체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holy hour)이 진짜 휴식이죠. 메인하우스 다락방 기도실과 미사시간에 기도하고 나면 다시 기운을 낼 수 있어요.”
그의 말에 나도 백 퍼센트 공감. 기도와 묵상하는 시간은 정말 나의 피와 살에 다시 생기가 돌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안되는 게 있는데, 여기 신부님들과 스탭들은 어떻게 할까?
“사실 게스트로 있을 때 가장 고단한 건 사실이에요. 나중에 견습생이 되고 스탭이 되면 조금 달라요. 일단 내 집처럼 자리를 잡고 나면 편안하게 지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죠.”
키에렌 신부님 얘기를 들으니, 게스트로서 내가 힘들어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다 이번엔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았다. 그는 한국에 대해 어느 만큼 알고 있을까? 마돈나하우스에는 한국 사람이 언제 처음 왔을까?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이나 남북이 분단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내가 기억하는 첫 한국인은 젊은 여성이었는데, 견습생으로 몇 달 있었어요. 그가 메인하우스의 작은 방에 있는 한복 입은 성모상을 선물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 단 하루도 한국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어요.”
그가 말한 성모상은 메인하우스의 작은 방에서 나도 본 적이 있었다. 아하. 단순히 한복 입은 인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오는 길. 눈 내리는 밤. 이야기를 하고 나니, 지쳤던 몸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특별히 그가 용기를 준 것도 아닌데 몸과 마음의 피로가 싹 녹아내렸다. 아무도 없는 눈길을 ‘행복해, 행복해’ 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나가게 되어도 여한이 없는 밤이었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현장을 가다>가 있다.
제 일상에도 들여다 놓아야겠어요.
나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도 모든 게 Ok라며,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로 감사함을 회복하는 모습,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모습 따라 배워야겠어요.
'행복해~ 행복해~'하고 속삭이며 걷는 샘의 모습이 눈오는 그 밤을 참 빛나게 했을 것 같아요.
읽을 때마다 새롭네요. 이번 글에 두고두고 새겨두고픈 문장이 곳곳에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