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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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해
  • 최태선
  • 승인 2024.05.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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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bryondraper.com
사진출처=bryondraper.com

얼마 전, 90세이신 한 여성 목사님 한 분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분은 목사님이면서도 내가 말하는 관상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영어로 관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해보았다. Contemplation이라고 대답을 하면 더 못 알아들을 것 같았다. 그래서 meditation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단어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묵상과 비슷한 것이라는 대답을 해드렸다.

내가 관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세이비어처치를 이끌어가는 힘이 관상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세이비어처치의 멤버들은 일 년에 한 번 이상 피정을 하기로 약정을 했다. 피정에서 그들이 하는 일은 관상이다. 그리고 세이비어처치에는 관상을 지도하는 목사가 있다. 그들은 관상을 통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모든 삶을 드리는 예수의 제자로 살아간다.

그런 그들은 150여 명의 작은 무리에 지나지 않지만 미국의 그 많은 대형교회들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급진적으로 세상을 바꾸어나간다.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내게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 열 명을 준다면 세상을 변화시켜 보이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참된 예수의 제자 한 사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그와 같은 사고를 지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런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가 아닌 개인으로서 하는 나의 노력은 유치하고 어리석어 보일 뿐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나를 보는 사람은 기껏해야 하는 기인(奇人)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함량미달의 예수의 제자이며 특히 공동체가 없는 개인이기에 복음대로 살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오래 전 내가 참가했던 목회자영성수련회라는 모임에서 렉시오디비나에 대해 듣고, 이후 관상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관상기도로 메울 수 없는 것을 나는 향심기도,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 화살기도나 예수기도와 같은 것으로 메우며 주님을 향한 내 초점을 유지해나가고 있다.

내가 관상기도에 대해 배운 것은 가톨릭의 여러 서적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은 틱낫한이라는 베트남 출신 스님의 책들을 통해서였다. 그 책들을 통해 호흡과 걷기를 배우고, 그곳에서도 역시 공동체의 중요성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여러 방법들을 배웠다.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관상기도가 주는 유익에 대해 설명을 해도 겁부터 낸다. 그것이 타종교의 기도라던가 이단들의 기도방식이기 때문에 영적인 타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신교의 주된 기도방식인 “예수 삼창 기도”를 드리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 기도는 생각할수록 갈멜산 정상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드리던 기도를 닮았다. 물론 초기교회의 기도가 예수 삼창 기도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 차이 역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나는 칠층산으로 알려진 관상기도의 대가인 토마스 머튼이 불교의 선승들과 나눈 대화들을 보았다. 하바드 대학의 신학자였던 하비 콕스 역시 자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보다 불교의 선승들이 더 대화가 통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책에서 토로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과 틱낫한의 대화가 담긴 책을 열심히 보았던 기억이 있다.

“참선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몽둥이로 다그치는 것입니다. 잠시만 앉아 자신을 돌이켜 보면 모자람이 그대로 드러나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알도록 해주는 것이 참선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부의 큰 성취를 바라지 말고, 큰 허물없기를 바라야 합니다.”

관상기도 역시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 그런 면에서도 관상은 참선과 흡사하다. 김기석 목사님은 늘 기도의 정의를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로 자신을 조율하는 시간이라는 말을 즐겨 한다. 나는 그분의 기도 이해를 좋아한다. 나 역시 그렇게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할수록 나는 나의 부족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길을 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는다. 내가 지금처럼 외로운 길을 갈 수 있는 것도 관상기도를 통해 주님 앞에서 나를 조율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세이비어처치의 비결이 관상기도에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취에 익숙해져서 자기반성을 위한 기도인 관상기도를 꺼려할 수밖에 없다. 청산유수처럼 매끄럽게 기도하고, 세련된 신앙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한계는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그들의 종착지는 위선자일 뿐이다.

내 이런 지적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드리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도전할 수 없다.

김기석 목사님처럼 ‘주님 앞에서의 멈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하면 자신도 모르게 침묵에 익숙해지고, 침묵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욕망을 볼 수 있게 되고 참선을 하는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굳이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고 몽둥이로 다그치지 않아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욕망의 존재인 자신의 한계를 보고,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사실 역시 알게 될 것이다.

참된 신앙인의 삶을 관찰해보면 그들에게는 모두 고립의 시간이 존재한다. 스스로 고립된 공간을 찾거나 만들지 못한다면 물리적으로라도 고립의 장소와 고립의 시간에 머물게 함으로써 주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훈련하고 양육하신다. 그래서 나는 파산과 교회의 휴면으로 고립된 내 삶을 은혜로 받아, 단순히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립 안에서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로 조율하는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개신교에 없는 가장 결정적인 것 하나를 들라면 관상기도를 꼽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대부분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이 이방의 기도나 다른 종교의 기도라는 판단을 반복해서 내림으로써 그것을 회피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복해서 세이비어처치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들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예수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세이비어처치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그곳에 올라오는 내용들이나 글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감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모든 힘의 원천이 관상기도라는 사실을 꼭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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