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인근의 자연휴양림을 다녀왔다.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런 곳에서 살고 싶었다. 휴양의 의미는 편안히 쉬면서, 지치거나 병든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몸이 병들었거나 마음이 병든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런 곳에서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활력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휴양림을 떠나면서 큰아이는 그곳에 다시 오자는 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가족 중에 작은 사위 한 사람의 생일만 남았다. 그래서 그때 예약을 하고 오기로 정했다. 곳곳을 둘러보며 가장 좋은 장소가 어디인지를 봐두었다. 우리가 둘러보는 동안 아내는 시간이 나기만 하면 망초를 땄고 손자 녀석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쑥을 뜯다가(지난 번 감자를 심으러 갔을 때 쑥을 배웠다) 아내가 뜯는 망초를 본 후엔 녀석도 망초를 따는 일에 합류했다.
돌아오는 길에 수타짜장면을 먹었다. 내가 짜장면 목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가 짜장면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다른 것을 먹자고 했지만 아내가 먹겠다고 해서 짜장면을 먹게 되었다. 정말 맛있었다. 짜장면을 먹은 후 이제 한 육 개월 정도는 짜장면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모두가 웃었다. 그만큼 만족스러웠다. 짜장면뿐만 아니라 만족스런 가족여행이었다.
그렇다. 자연에는 우리가 모르는 힘이 있다. 나는 그걸 굳이 기(氣)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자연 속에서 그걸 느낀다. 나는 그럴 때 섬머셋 모엄의 <달과 육 펜스>가 생각난다. 은행원이었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처음 가는 장소인 타이티에서 고향을 느낀다. 그곳에서 그가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다 죽는다. 고갱의 일생을 그린 이 소설에서 우리 인생에는 낯설지만 본향처럼 느끼는 것이 있고, 그것이 대부분 자연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처럼 한평생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곧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다. 산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숲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정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아마도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이 자연을 찾게 되는 이유도 법정의 이 말 속에 들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산) 속에는 종교가 있다. 내가 농촌교회를 지망하지 않았던 이유는 농촌교회 역시 도시교회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어떤 의미에서 농촌교회는 더 추장이나 왕처럼 목사가 군림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성령의 역사를 좀처럼 경험하기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기 최면이나 자기도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내가 제도권교회를 떠난 후에는 대형교회의 세련된 찬양팀들이 손을 들고 무아지경에서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은혜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찬양을 부르면서도 찬양이 끝나면 그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찬양을 부르는 것이 그들을 착각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 그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새 노래’가 아니다.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세상의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와 비슷해진다. 거기에 동참해 손을 들고 찬양을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을 불러도 그곳이 벽돌과 시멘트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휴양소를 다시 오자는 딸 내외에게 나와 아내가 자연 속에 위치한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가난해진 후 아내는 나와 달리 겁이 많아졌다. 그것은 돈 없이 지내야 하는 세월 속에서 위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 속에서 나는 오히려 담대해졌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아내는 반대로 두려움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런 아내가 측은하다. 나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때가 되면 우리를 움직이게 하실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그런 곳으로 이사를 한다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세컨하우스라면 몰라도 완전 이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죽으러 간다는 말을 한다. 잘 죽기 위해서 그곳엘 가는 것이라는 내 말은 진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잘 알아보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이를테면 주변 땅 시세라든지 집을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돈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내 마지막 삶을 잘 살 수 있는 여건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나 잘 자란 유실수와 같은 것들에는 세월이 담겨 있다. 물론 정성도 담겨 있다. 그런 것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는데 사람들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들만을 가치로 여긴다. 여기서도 나는 다른 삶의 방식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쑥을 뜯을 줄 알고 망초를 구분할 줄 알게 된 손자 녀석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지금도 올 때마다 옥상 텃밭에 들러 물을 준다면서 내가 애써 가지런히 해놓은 작물들을 흐트러뜨려 놓는다. 우리 집에 오면 가장 먼저 일층 화단과 옥상에 들러 내가 심어놓은 것들이 얼마나 자랐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녀석의 일과다. 참 이상한 녀석이다. 나는 그래서 녀석이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남은 삶 동안 어떤 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 나는 알 수 없다. 주님이 나를 불러 어떤 일을 하게 하실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언가 그럴만한 일을 하게 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게 된다.
최소한 내가 시골 전원주택에서 살게 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휴양소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장실이 딸린 작은 별채나 황토찜질방 같은 곳과 텐트를 칠 수 있는 데크를 만들어 놓으면 편하게 오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한 번이라도 다녀가면 다시 오고 싶은 곳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사람들이 와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활력을 되찾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소박하지만 그런 일이라도 하고 싶다.
그것이 법정이 말하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의 산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내가 생각하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는 무슨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본질의 회복에 관한 중요한 통찰이 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일에 경도되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정상처럼 되었다. 하지만 일로 사람을 판단하는 습관은 카인의 후예들의 삶의 방식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그것을 하느님의 하신 일로 착각하거나 그런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하느님을 닮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시고 부르신다.
나는 내가 가게 될 곳이 변방이 되기를 원한다. 성문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를 원한다. 주님이 그럴 수 있는 은총을 내게 허락해주시기를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