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지매는 강남의 헤어샵에서 머리를 한다. 대구 미씨(missy)는 서울 현대백화점에서 쇼핑을 한다. 대전의 디스크 환자는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한다. KTX 때문이다. 처음 고속철도가 건설될 때 고속철이 지나는 곳은 도시가 발전하고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보았다. 다들 기대가 컸다. 지금도 자기 지역으로 KTX가 지나게 해달라는 민원이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고속철도가 지나는 도시의 경제가 오히려 수도권으로 흡수되는 역전현상이 일어났다. 고속철이 수도권 기능을 지방으로 분산시키고 기업을 이전시킬 것이라는 기대보다 지방경제가 오히려 수도권에 더 집중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수도권의 문화가 지방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외부 문화에 반응 속도가 느리고 둔감한 대전에서 시대를 읽는 감각과 정치적 센서가 빨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대전은 지난 21대에 이어 전석을 민주당이 석권했다. 충청도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반응 속도가 느린 곳 중 하나인 공주 청양 부여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됐다. 부울경에서는 지난 총선에 비해 당선자가 줄기는 했으나 야권 지지도가 상승했다. 대구에서는 전석을 여당이 석권하였지만 20대와 40대는 야당 지지율이 과반을 넘었다. 서울의 민심이 지방으로 빠르게 전이된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의 정의에 대해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의미 있게 돌아봐야 한다. ‘교양’이란 말이 중세에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다 성숙하고 완전에 가까워진 인간을 지칭하는 신학적 용어였다. 하지만 18세기 이후로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교양이란 말은 교육을 통한 인격적 성숙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아가 루카치(Georg Lukacs)는 교양을 개인이 사회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비판적 인식능력의 문제로 보았다. 즉 교양은 지식이 얼마나 있는가, 에티켓이 있는가를 넘어서 시대와 사태를 분별하는 지성의 유무에 따른 것이다. KTX는 지역의 경제를 흡수해갔지만 서울의 교양을 지역으로 전이시켰다.
예수는 공생애 3년 동안 갈릴래아에서 활동했다. 갈릴래아는 고산(高山)의 사막 지대에 큰 호수가 있어 해상 교통이 발달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방 지역과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상업적 교류와 문화적 혼융(mixed)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때문에 이방인과의 혼혈도 많았고 여러 지역 언어가 혼용되었다.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갈릴래아는 ‘이방의 갈릴래아(마 4:15)’로 폄하되기도 했다.
갈릴래아는 물류와 정보, 언어와 인종, 정치적 저항과 혁명이 꿈틀대는 땅이었다. 외부와의 활발한 교류와 소통이 가능한 접경지역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에 빗대어 말하자면 갈릴리는 정보와 물류, 문화가 가장 활발하게 유통되는, KTX가 지나는 도시였다. 이곳에 예수가 출현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전을 중심으로 보수적인 예루살렘 정주권자들은 갈릴래아의 다양성과 문화를 터부시했다.
비록 바울에 의해서 그 문이 열렸지만 그리스도교는 갈릴래아의 다양성과 소통 능력에 의해 세계 종교가 됐다. 정통성만을 고집하며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한 유대교 성전은 티투스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마르 13장) 파멸을 당하게 된다. 이후로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2천 년 동안 떠돌아야 했다. 이번 총선에서 다양성과 소통을 거부하고 보수성에 갇혀버린 백두대간 동쪽 지역의 정치의식은 성전 이데올로기에 갇힌 유대인들의 정통의식과 닮아 있다.
그런데 이런 꼴통 보수성은 오늘날 교단 내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서울신학대학에서 창조과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영식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고 한다. 박영식 교수는 유신진화론 입장에서 창조과학을 폄하한다고 비난받았다. 유신진화론은 과학으로 창조를 설명하려는 '과학적 창조론'과 구분되는 '신학적 창조론'으로, 진화 과정도 하느님의 창조 섭리 아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서울신학대학은 그런 그를 향해 창조과학을 들이대며 ‘믿느냐?’고 따져 물은 것이다. 신비적이고 비과학적인 신앙의 유산을 과학적 실증주의로 증명하려는 유치한 발상이다. 신앙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규정하려는 것은 신앙의 고유성을 짓밟는 짓이다. 정통 과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 사이비과학인 창조과학으로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때 이북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북청년단은 민간을 향해 테러와 협박을 일삼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념을 내세우며 금품을 갈취하고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하며 애국을 강조했다. 다짜고짜 “너 빨갱이지?”라며 몽둥이를 내리치는 일로 공포사회를 만들었다. 지금 서울신학대학에서 박영식 교수에게 하고 있는 짓이 그와 같다. 그것은 애국을 가장한 파시즘처럼 정통신앙을 내세운 테러다. 하느님이라는 이름 없이는 하느님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예수의 이름이나 십자가 상징 없이는 예수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는 이 무능하고 저급한 꼴통 보수성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죽인 것이다.
교양은 분별하고 비판하며 소통하며 진실을 향해 가는 고속철이다. 그러므로 교양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서로를 향해 뻗어 있는 철도다. 교양이 배달되지 않는 곳에서는 보수성이 곰팡이처럼 피어나 정신을 썩게 한다. 그러므로 교양 없는 자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시대를 장악하며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 백두대간 동쪽을 빨갛게 물들인 것이다. KTX가 닿지 않는 곳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거기가 예루살렘이다. 당신이 성전이라고 믿고 있는 그 보수성이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이다.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구원의 보수(報酬)를 받지 못하리라.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