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유니언대학 현경 교수 인터뷰]
뉴욕 유니언대학에서 현경 교수를 만났다. 본명은 정현경, 다양한 퍼포먼스와 제의, 축제를 통해 신학을 표현하는 ‘신학적 예술가’로 불리는데, 학술과 사회운동, 영적 수련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어 ‘문화통역사’로도 불린다. 여성해방신학자이며 환경운동가, 평화운동가 등 다양한 수식어가 있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을 ‘살림이스트’로 불리기를 바란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동대학원을 나온 후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었고, 1996년 유니언 신학대학의 종신교수로 부임해 현재 뉴욕에 살고 있다. 저서로는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Struggle to be the Sun Again),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2>, <미래에서 온 편지>,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등이 있다.
-“가장 여성적인 것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괴테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먼저 여성성 또는 여성적인 것이 무엇일지 교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융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원형(Arche Type) 차원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여성성은 부드럽고 양육하고 보살피고 돌보고 자비롭고 유동적이라고 봅니다. 한편 남성성은 이성적이고 결정적인 성향을 지닌다고 이분법적으로 보는 거죠. 서양에서는 늘 이런 식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분해 왔어요. 물론 동양에서도 음양설에서 양은 불 같고, 음은 물 같다고 표현하죠. 이게 세상에 대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페미니즘 안에서도 남성성이 뭔지 여성성이 뭔지 논란이 많았어요. 그런데 여성성, 남성성을 양극적인 구도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발상 자체가 여성의 억압에 기여해 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여성성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 거죠.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2의 성>이란 책에서 말한 것처럼 가부장 문화에서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최근에 쥬디스 버틀러라는 학자는 “젠더는 퍼포먼스”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공연’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강조하는 여성적인 삶을 공연하면 그때 나는 여성이 되는 거고, 남성으로 공연하면 그때 나는 남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이란 게 아주 유동적인 것이 됩니다. 고정된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생리학적으로 성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로 들리네요.
요즘은 트랜스 젠더(성전환) 하고 싶은 사람도 생겨나고, 전업주부로 일하고 싶어하는 남성들도 많아졌습니다. 전통적인 성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생각했던 젠더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거지요. 미국사회에서 두드러진 현상이기는 하지만, 학생들을 보면 변화를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구분되었는데, 요즘은 그게 힘들어요. 학생들은 자기를 그런 젠더 범주에 넣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아요. 나를 여성이나 남성인 피터로 보지 말고 그냥 ‘피터’로 봐달라는 거지요. 이름을 아예 바꾸는 학생들도 있어요. 피터는 보통 남자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티카’로 이름을 바꾼 아이도 있어요. 티카, 이 이름만 들어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죠. 남자가 치마 입고, 여자가 바지 입어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학생들은 남성성, 여성성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피터로 살고 싶다는 거예요.
친구를 사귈 때에도 사람보고 사귀지, 성기보고 사귀는 게 아니라는 거죠. 남자니까 여자 사귀고, 여자니까 남자 사귀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곳 컬럼비아 대학의 경우에 좀 래디컬해서 그런지, 신입생 때 여자로 입학해서, 졸업할 때는 남자로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이름도 바꿔요. 피터에서 패트라로 바꾸고. 어떤 급진적인 친구들은 그냥 내가 남자로 살고 싶으면 남자로 퍼포밍하고, 내가 여자로 살고 싶으면 그대그때 여자로 퍼포밍하고 그래요. 아니면 아예 ‘She’(그녀)나 ‘he’(그)를 ‘it’(그것)이나 ‘they’(그들)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여성성과 남성성은 분명한 다른 측면이 있다고 보는 데 어떻습니까?
그렇죠. 음양오행설처럼, 물이 있으면 불도 있고, 직선적인 게 있으면 곡선적인 것도 있죠. 용감하게 판단해야 할 때가 있으면 감사 안아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걸 전통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한 인격 안에 통합 되어야 할 두 가지 성향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아요. 카알 융도 모든 사람이 자신 안에 여성성, 또는 남성성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래야 개성화가 되고,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는 거죠.
여기서 동양의 음양설이 참고가 될 수 있겠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처럼, 서구의 이원론은 “A는 A가 아닌 것과 같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양설에서는 음 안에 이미 양이 들어 있고 양 안에 음이 이미 들어있어서, 음이 극이 되면 양이 되고 양이 극이 되면 음이 된다고 봅니다. 저도 살아보니까 이게 맞는 것 같아요. 컴퓨터 언어처럼 1과 0 두 가지로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 비현실적입니다. 불교에서도 ‘꽃은 꽃이 아닌 것을 통해서 꽃이 되었고, 결국 꽃이 아닌 것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생물학적인 여성, 남성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적인 것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여성적인 것이 인간을 구원하다는 말도 그래요. 생물학적인 여성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르완다에서 여성들이 더 평화로운지 의문이 듭니다. 르완다에서 투치족과 싸울 때 여자들이 도끼 들고 와서 사람 죽이고 그랬잖아요. 물론 본성적으로 여성이 더 양육적일 수 있어요.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동물 수컷은 자기 자식들을 내던지고 잡아먹고 그러는데, 암컷들은 보통 돌봄에 익숙합니다. 여기에 생물학적 영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남자는 한 번 사정하면 그만이지만, 여자는 아홉 달을 자기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자기 몸이 찢어지는 아픔을 통해 출산하고, 아이와 엄마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었잖아요. 이 때문에 엄마는 아이를 자기 몸의 일부로 여기죠.
캐럴 딜리건 하버드대 교수는 “남자는 자기중심적이고 단독자로서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워지고, 여자는 관계를 잘 맺는 인간으로 키워진다.”고 말했어요. 남자는 관계를 잘 못 맺어도 사나이답다는 말로 살아남고, 심지어 독불장군이라면서 멋있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자가 독불장군처럼 굴면 다 도태되었거든요. 가부장제 아래서, 여자는 살아남기 위해서도 사근사근하고 관계를 잘 맺으려고 하는데, 그게 뭐예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남의 마음을 더 잘 알아주고 하는 거죠. 여자는 엠퍼시(empathy), 심퍼시(sympathy), 컴패션(compassion)이라고 하는 공감능력과 연민과 같은 것을 제2형질로 개발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관계지향적인 공감능력이 우리의 획득형질일지라도, 21세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유엔에서도 가난한 나라에 지원하면서, 여자에게 돈을 줘야 공동체가 살아난다고 하잖아요. 구호단체에서 낙후한 지역의 남자들에게 돈을 주면 그 남자가 술 먹고 폼 잡다가 돈을 그냥 다 써버린다고 해요. 공동체에 전혀 보탬이 안 되죠. 그렇지만 여자한테 돈을 주면 온 가족이 살아나고 공동체가 살아난다고 해요. 시장에서도 여자에게 소액대출을 해주면 99% 다 갚아요. 그 돈으로 조그만 구멍가게라고 해서 집안을 살리는 거죠. 여자는 단독자로 키워진 것이 아니라서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 된 거죠.
-여성적인 것이 인류의 미래적 가치일 수도 있겠네요? 지금 여기에서 이미 경험하기 시작한.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는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가 지구화되면서, 가장 먼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고 모든 사람을 개별화 했어요. 한국도 혼자 밥 먹고 쇼핑도 1인용이죠. 식당이나 찻집도 혼자 먹는 집이 나오잖아요. 이게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이래서야 공동체도 붕괴되고 사람도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새로운 문명이 만들어진다면, 그게 가부장적 제도에서 나온 여성성이라 할지라도 공동체를 돌보는 공감능력과 ‘어머니적인 정의’를 발전시켜야 해요.
아버지적인 정의는 말 안 듣고 잘못하는 아이는 시시비비를 가려 징계하는 정의이지만, 어머니적 정의는 회초리로 때리다가도 다시 끌어안는 정의죠. 그래서 어머니적인 정의와 평화로 가야 지속가능한 문명이 됩니다.
고대의 여신이 중심이 된 사회가 있었다는데, 이런 엄마 중심의 공동체 문화가 훨씬 전쟁을 덜하고 군대도 공격보다는 방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인간의 공격성을 스포츠나 예술로 승화시켰지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동체적이고 복지적이라고 봐야죠.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려는 공동체가 지속가능한 미래입니다. 그걸 고대 여신 전통이라고 하는데, 학자들 사이에선 그런 여신 전통이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직도 논란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캐롤 크리스티 같은 여성신학자가 한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고대의 여신전통 사회가 상상의 산물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거지요. 그것을 고대인들의 염원을 담은 비전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예수님도 복음서에 나타난 그대로의 모습이 진짜인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복음사가들이 덧붙인 것도 있고요.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냐,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믿음을 공유하고 그 가치대로 살 생각이 우리에게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믿으면 우리 삶이 변하잖아요. 예수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인지 다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분을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거지요.
아프리카에서는 “사자가 역사를 쓰기 전까지 모든 아프리카 정글의 역사는 사냥꾼의 역사였다.”는 말이 있어요. 어차피 그동안 쓰여진 것은 남자들의 역사였죠. 고대 종교에서 여신상을 숭배한 사실을 두고, 여성신학자나 고고학자들은 “이것 봐라. 여성들이 이렇게 존중되었네.” 말하지만, 남자신학자는 이런 여신상들이 다 그 당시의 포르노그래피였다고 말해요. 그렇게 보는 사람에 따라서 관점이 다른 거죠. 이런 점에서 여신전통은 ‘오래된 미래’라고 볼 수 있어요. 여성성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관점에서는 그래요.
예전에 테드(TED) 토크에 나간 적이 있는데, CEO이신 남성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벤처기업 연구하러 전 세계를 다녔는데, 여성성이 기업의 미래라고 하더군요. 위계질서가 아니라 동그랗게 앉아서 옷도 헐렁하게 입고 자기 할 말 다하는 회사가 잘 된다는 거지요. 상하위계가 아니라 마음껏 원형탁자에 앉아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기업이라고 말해요. 이른바 ‘여성적인 운영’이 강조되는 거죠. 물론 박근혜 대통령 같은 스타일을 여성적인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저는 박원순 시장과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전통적인 남성성을 갖고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박원순 시장이 남자인데도 전통적인 여성성에 가까이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생물학적으로 어떤 성기를 달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핵심가치, 중심가치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뜻에서 여성성이 더 진화된 가치라고 저는 생각해요.
-여성성이 더 진화된 가치라면, 여성성이 우리에게 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준다는 말인가요?
그렇다고 봐야죠. 저희 또래끼리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해요. 큰 아들 때문에 정말 골치 아프다고. 여기서 큰아들은 남편들이예요. 작은 아들은 이쁘기라도 한데, 남편들은 철딱서니가 없는 아들 같다는 거죠. 그 남자가 자기 여성성을 열심히 개발하면 늙어서 정말 좋은 친구가 될 텐데, 하고 바라죠. 한국 남성들은 대부분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늙으면 퇴직하고 월급도 가져다 주지 않는데, 집안에서 여전히 군림하려고만 하니 여자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거죠.
저는 여성성이 영성적으로 볼 때 진화된 성향인 것 같아요. 사막의 교부들이나 신비가들의 특징은 그분들이 남성이면서 아주 여성적이었다는 거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신비주의란 먼저 자신을 비우는 데서 시작하잖아요. 내 목소리를 높여 떠들기보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하죠. 머리로 분석해서 신이 있냐, 없냐 따지지 않고 가슴으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그걸 보면 굉장히 여성적인 특성이 미래적이고 지속가능한 공동체와 지구를 만들어요. 카우보이나 람보처럼 세계를 끊임없이 개척하고 정복하고, 칭기즈 칸이나 알렉산더처럼 군림하고 그러면 우리 다 죽어요. 그게 멋있어 보이는 게 문제죠. 엄마들이 살림하듯이 지구를 돌봐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것처럼, 인간관계도 공을 들이는 만큼 성장합니다. 그런 힘은 여성으로 키워진 사람들이 많이 갖고 있어요. 그래도 남는 문제는 이런 여성성이 자발적인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획득한 태도라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자칫 마지막까지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 의존해서 자기 삶을 만들어 가려고 해요.
고대신화를 보면, 영웅들이 집을 떠나서 드래곤을 만나서 죽이고 보물을 가져가서 공동체에 다시 나눠주잖아요. 모든 신화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남자 영웅전과 여자 영웅전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남자들은 그렇게 키워졌어요, 출가해서 공부를 하든 직장생활을 하든 사회운동을 하든 사회에서 용을 죽이고 탈취해서 공동체에 나눠주는 영웅으로 키워진 거죠. 여자 영웅전은 조금 달라도 될 것 같아요. 집을 한 번도 안 떠나고 내가 있는 곳에서 정말 지지고 볶고 죽을 쑤면서, 구질구질하게 아이들을 키우고 밥을 먹이고 공동체를 살리고 농사를 짓고 그러면서 수난과 인간의 모든 면을 깨달아서 지금은 돌아와 거울에 앞에 선 누이처럼 되는 것이죠. 그게 사실상 훨씬 어려운 영웅전입니다.
-일상을 감당해내는 새로운 영웅전이군요. 그런데, 이렇게 살면 좀 재미없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도를 닦아야 하는 거죠. 가정주부만이 아니라 교수들 사이에서도 여자교수들과 남자교수는 달라요. 저 같은 경우에도 남자 교수들보다 학생들에게 더욱 시간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학생들의 가슴이 보이니까요. 저는 미국에서 교수생활 하지만, 매 학기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밥을 지어 먹여요. 종강하면 다시 집으로 학생들을 초대해서 밥을 먹고요. 미국아이들이 그런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신기하게 여기죠. 그럴수록 수업시간에 마음을 열고, 공부도 깊어져요. 용을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상의 수행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일상에서 봉사하고 보시하는 영웅들은 폼이 안 나요.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노희경 님인데요, 그분 아버지께서 바람도 피우고 폭력적이어서 평생 식구들이 고생햇다고 해요. 그래서 노희경 님은 아버지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아버지가 암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그분을 모실 형제가 아무도 없었던 거죠. 결국 정토회에 열심이던 노희경 님이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 모시게 되었고, 매일 천 배씩 절하며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편안히 배웅해 드렸다고 합니다. 이런 게 다 수행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자비의 해’를 여셨는데, 자비의 핵심은 모성적 가치이고, 자비의 해는 모성적 가치의 확장을 요청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어머니 하느님’이라고 부르자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우리시대에 하느님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저는 모든 게 변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그리스도인은 우리시대에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제 생각에는 ‘아버지 하느님’이나 ‘어머니 하느님’ 모두 다 써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난 2천년 동안 ‘아버지’ 하느님이란 말만 계속 썼으니까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제는 ‘어머니 하느님’이란 말도 조심스럽게 서보는 게 나브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 몸이 아픈 것은 우리 몸이 균형을 잃어버려서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군형이 중요한 거죠. 대학에서 <중용>을 가르치는 유교학자에게 배웠는데, 중용이란 딱 중간으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고 해요. 한쪽으로 치우쳐 살았을 때 다른 쪽을 충분히 살아주는 게 중용이죠. 굳이 ‘어머니 하느님’이라고 쓰지 않아도 좋아요. 하느님의 모성성을 드러낼 수 있다면 ‘소피아’랄지 ‘지혜’란 말을 써도 됩니다.
구약성경에 ‘엘 샤다이’란 말이 있는데, ‘자궁이신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그 말을 번역성경에서는 보통 ‘산 같은 하느님’이라고 하는데, ‘산’이 사실은 ‘유방’이기도 하지요. 유방이 산처럼 생겼잖아요. 그러니 정말 우리 ‘젖가슴 같은 하느님’, 우리에게 젖을 먹이시는 하느님 등 여성적인 메타포를 자꾸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어머니 하느님’이라고 쓰면 반발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럴 때 시적인 은유를 사용하면서 ‘어머니 사랑같이 우리를 품어주신 하느님’ 이라고 써도 되는 거죠.
이천 년 동안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것일 텐데도 성경 어디에도 하느님의 성기에 대해 말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우리의 상상력이 하느님을 ‘아버지’로만 생각한 거죠. 우리가 정말 건강한 영성도 가지려면, 여성성과 남성성이 통합된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전쟁에서 우리 편을 드시는 승리하시는 하느님, 모든 악마를 물리치고 못된 놈들을 물리치는 전사이며 사령관 같은 하느님, 만병통치와 전지전능 해결사인 하느님만 섬겼죠. 사실 우리는 그동안 조폭 같은 하느님을 믿어왔잖아요. 그러니 신앙인들은 십자가의 ‘군병’이란 이미지를 갖게 된 거죠. 그런 군사적인 이미지는 그만 썼으면 해요. 우리를 먹이시고 키우시고 옷을 입히시고 치유하시는 그런 하느님을 더 많이 써야 해요.
메리 데일리나, 캐럴 크리스티 같은 급진적인 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남자이면 남자가 신이 된다고 봐요. 우리의 상상력 안에서 하느님이 ‘남자’로 항상 박혀 있으면, 이게 우리도 모르게 무의식에 박혀서 남자가 신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부정의를 영속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균형 잡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끊임없이 모성적이고 여성적인 하느님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상봉(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