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 신부 알렉산더 슈메만의 <성찬>은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이다. 교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의 중심이고 그 핵심은 성찬이다. 정교회의 우주적 교회론을 성찬을 통해 설파한다.
그러나 내용의 깊이와 울림에서 떼이야르 샤르댕의 얇은 책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나 레오나르도 보프의 <聖事란 무엇인가>의 문지방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다. 폴 틸리히는 개신교에서의 성사의 죽음을 언급하는데 그는 논문에서 성사를 자연의 힘과 결부시켜 논의한다. 자연의 힘을 상실한 개신교는 성사도 빈사 상태에 들어갔고, 자연을 상실한 개신교는 구원도 매가리가 없다고 말한다.
샤르댕은 성사를 우주적 차원으로 넓힌 반면 보프는 일상성 속에서 성사를 발견하게 한다. 가령, 우리 집 물잔의 성사, 어머니가 구우시는 빵의 성사, 성탄선물로 받은 양초의 성사, 살아온 사연들의 성사, 시골학교 선생님의 성사, 정든 옛 집의 성사, 내뱉은 말의 성사, 심지어 아버지가 피우시던 꽁초도 성사라는 것이다.
보프의 담배 꽁초에는 남다른 사연이 깃들어 있다. 가슴에 사무쳐 오는, 온갖 경계를 뛰어넘어 한없는 추억이 담긴 사연이 숨겨져 있다.
보프가 1965년 뮌헨에서 유학을 하던 중 그해 8월 11일 고향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는 집에 있는 식구들 모두의 합작 편지다. 편지라기보다는 거의 신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약술)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뮌헨에 당도해 있겠구나. ... 하느님께서 며칠 전에 우리들에게 사랑과 믿음과 감사의 봉헌을 요구하셨다. 사랑하는 우리 아바를 당신 것으로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빠를 우리에게서 앗아가신 것이 아니다. ... 아빠는 떠나가신 것도 아니고 도착하신 거란다. 멀리 떠나가신 것이 아니고 새로이 다가와 계시단다. 더 크게 아버지가 되고자, 오늘도 또 언제까지라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여기 브라질에서 우리 모두와 함께, 거기 독일에서 너와 함께”
편지에는 오누이들 모두의 말들이 이어지면서 죽음이, 쉰넷이라는 한창 나이의 한 사나이에게 닥쳐온 죽음이 우정의 영접을 받으며 일치의 잔치로서 거행되고 있었다. 이튿날 보프는 봉투에서 그 전날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던 한 생명의 표징을, 우리들에게 모든 면에서 생명을 선사해주셨던 그분 생명의 표징을 발견했다.
지푸라기로 감은 누르끼리한 담배 꽁초였다.
심장 마비로 이 세상 고생에서 해방되기 직전의 얼마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아버지가 피우시던 마지막 담배였다. 이 순간부터 이 꽁초는 꽁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 성사가 되었다. ... 그래서 그것은 무한히 귀중한 가치가 있고 삶의 핵심에 속하는 것이며 우리의 가장 깊은 내심에 부딪쳐 온다.
보프는 성사에 대하여, 사물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전달될 때 그것은 성사이다. 세계의 사물들과 인간들은 하느님의 생명의 숨으로 사무쳐 있다. 믿음의 눈에는 지극히 단순한 일상의 몸짓 하나에도 은총의 현존이 보인다.
시인 김지하의 이야기 모음 『밥』도 성사이다. “밥은 하늘이다”는 말은 밥이 성사라는 말이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김지하 <밥> 중에서
성사적 사유는 시적 사유이다.
성사적 사유는 예술적 사유이다.
파이프를 들고 있는 큰 신학자 칼 바르트 그리고 체 게바라의 궐련도 예사스런 사물은 아닐 것이다.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1985)
독일 베텔신학대학(Kirchliche Hochschule Bethel) 신학박사(1991)
(사)한국영성예술협회_예술목회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