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거룩함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불리움을 받는다. 반면, 몇몇 사람들은 특수한 소명을 받고 수도적인 서약을 통해 더욱 엄숙한 의무의 계약을 맺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명인 거룩함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다가가기도 한다. 그들은 확실하며 더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복음적 권고인 “완전하게 되기”를 약속하였다.
그들은 가난하고, 순결하고, 순종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하며, 세속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더욱 완전히 바치고자 한다. 그들에게 성화(聖化)는 단순히 이루어야 할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성화는 그들의 “사명”이다. 그들에게는 인생에서 성인이 되는 것 이외에 해야 할 일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이 목표를 따라 가는 것으로 그들에게는 가장 우선적이며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도자들이나 성직자가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의무를 가진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 사실은 그들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며, 평신도가 어떤 면에서든 그들보다 떨어지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들보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젊은 시절, 사막으로 나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후에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어 그리스도의 모든 일원은 그들이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도덕성, 하나의 거룩함만이 있을 뿐인데 - 그것은 복음에 제시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 만큼 평신도의 자격은 필연적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런만큼, 평신도들은 단순히 “죄를 피하기만 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어떤 정적인 거룩함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가끔 이러한 삶의 본분의 차이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심하게 왜곡되고 과도하고 단순하게 부각되어, 신부, 수사, 수녀들은 완전함을 향해 성숙하고 진전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평신도들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성직자들의 옷자락에 매달리듯, 홀로 “완전함”에 불리운 전문가들에게 이끌려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곤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수도자들의 삶이 더 엄숙하고 힘들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적인 성스러움의 주요 잣대가 어려움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평신도들에게 있어 구원이 덜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자칫 그들의 구원이 참다운 구원이 아니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히려 반대로, 크리소스톰은, “하느님은 수도원의 엄격함을 매일의 의무로 요구하실 만큼 우리 평신도와 재속성직자들을 엄하게 다루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셨다. [그분이 주신 권고에 관해] 어떤 사람은 동정을 지켜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물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하느님은 다만 도둑질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을 뿐이다”(고린토 전서에 관한 주석 중).
달리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일상적인 절제, 정의와 자선은 수녀들의 동정서원이나 가난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이다. 교회에 봉헌된 수도자의 삶이 더욱 존엄하고 내적인 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철저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평신도들의 삶을 하찮게 여기게 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결혼 역시 그 특성상 아주 신성한 것이며, 때때로 거기에 따르는 희생은, 경우에 따라서는, 수도자들의 희생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현실 안에서 보다 완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평신도라도 상관없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