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kabod’란 단어로 나타난다. 애초 ‘무게’ 혹은 ‘비중’의 뜻.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과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주로 ‘doxa’로 고정했는데 원래 ‘판단’, ‘의견’ 혹은 ‘광채’란 뜻으로 쓰였다. 이 단어를 중심으로 성경을 찬찬히 훑어 읽어 가노라면, 주제의 이해가 영적 생활 전반에 치명적으로 중요하단 사실에 새삼 놀란다.
권력과 영광
주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에 뒤이어 반응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요한과 야고보 모친의 ‘치맛바람 인사 청탁 사건’이다(마태 20,17-28 참조). 제자들의 뇌리를 지배하는 ‘영광’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병행구: 마르 10,37 참조). 반면 이 단락의 마지막 말씀은 스승께서 생각하시는 영광이 뭔지를 드러낸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8절).
요한 복음서는 존경받으며 권력을 행사하는 상태를 ‘사람들에게서 받는 영광’, 참된 영광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이라 따로 구분한다(5,41; 12,43 참조).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하나가 그 표상이다(12,24 참조; 바로 앞 절: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17장 전체에는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영광이 더없이 환히 드러나며 주제가 종합되고 영적으로 심화된다. 필경, 현양은 현양이로되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들어 올려지는’(12,32; 3,14 참조) 것이 참된 영광의 본색이다.
부정적 의미로든 복음적 의미로든 영광은 권력과 깊은 관계에 있다. 사실 ‘권력과 영광’(그레이엄 그린의 가톨릭 소설 제목이기도!)은 이른바 칠죄종 중 가장 ‘강적’인 교만의 두 속성이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정리한 칠죄종에선 허영(kenodoxia, 헛된 영광)을 교만(hyperephania)에 포함시켰지만,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가 묘사한 여덟 가지 “악한 생각”(loghismoi)에서처럼(여기가 칠죄종의 출전이다.) 둘을 구분하면 알아듣기가 더 쉽다.
허영(공명심)은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타인의 인정과 평가(‘영광’)에 간절히 집착한다. 그리고 교만은 자신을 모든 이의 위에, 그리고 온 세상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리에 앉히는 권력 지향성이다. 권력과 영광의 자장에서 벗어나기란 예나 이제나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영광뿐 아니라 권력의 참된 의미에도 빛을 비춘다. “내게는 죽을 권한도 살 권한도 있다”(요한 10,18 참조). 죽일 권력이 아니라 죽을 권한! 이것은 자기를 기꺼이 넘겨주고 바칠 줄 아는 이의 자유로서, 사실은 (참된 의미로) ‘살 권한’과 같다. 이는 당연히 참된 영광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텅 빈 충만
같은 주제로 바오로 서간을 훑어보면 ‘자랑’ 혹은 ‘자랑하다’(kauchaomai, 불가타 성경에선 (gloriari)란 표현이 자주 눈에 띈다. 바오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 편에서 내세울 것이 조금도 없음을 강조한다(“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로마 3,27]). 구원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존재와 삶 전체에서도 내 업적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4,7)
바오로는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없는 것”(ta me onta, 1,28)이라고까지 불렀으니, 나도 내 삶도 정녕 ‘없다’(無)고 해야 진실에 가까울 터. 이를 그리스도교적 견성(見性)의 자리라 부른다면 너무 나아간 것일까. 어떻든, 바오로는 참된 자랑(영광)에 대해서도 몇 마디 남겼다. 자랑은 본디 “주님 안에서” 하는 것인데(2코린 10,17), 그것은 “하느님을 자랑”하는 것이며(로마 5,11)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고(갈라 6,14 참조), 나아가 자기 약점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도 “더없이 기쁘게!”(2코린 12,9)
바오로 역시 십자가를 참된 영광의 자리로 본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2,1-11 참조)도 ‘영광’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는데(“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영광의 최종 수신자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이심이 드러난다. 결국 그리스도 찬가에 그리스도는 없다! 주님의 기도도 잘 읽으면, 거기 주님께서 계시지 않듯.
온통 텅 비었다. 그래서 충만하다. 아드님의 관심사는 온통 아버지의 영광뿐이었으니, 조금도 사람들 시선을 자신으로 향하게 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 당신 영광이요 기쁨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
아드님의 이런 영광이 아버지의 영광을 빼다 박은 거라고 본 신학자가 있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아드님 ‘자기 비움’(kenosis)의 원형과 출처는, 아드님을 낳으실 때 아버지 편에서 벌어진 자기 비움이었다는 것이다. H.U. 폰 발타사르에 따르면, 아드님의 영원한 탄생은 아버지 편에서의 ‘자기 제한’이요, 스스로의 ‘하느님 됨’ 곧 신성마저 내려놓으셨음을 뜻한다. 그는 이런 특별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죽음’(Über-Tod)을 운위하기까지 한다(Theodrammatik, 제4권).
그의 말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필경 십자가는 삼위일체 신비의 한복판에서 무시(無始)로부터 벌어지는 자기 비움과 자기 선사의 사건으로서 ‘영광’의 유일한 자리란 결론에 이른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라면(도스토옙스키), 자기가 텅 빈 이 자리에서 솟는 빛(영광)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오래전 시골 수도원에서 지낼 때, 서울 가면 터미널 지하상가 서점에 들르곤 했다. 그날도 좋은 신간들을 둘러보는데 내 또래 저자들이 많았다. 순간, ‘사람들은 내 나이에 이런 훌륭한 결과물을 내는데 나는 뭐하고 있나?’ 하는 우울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순간, 칼처럼 마음을 베고 지나간 성경 구절이 있었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이사 52,13). 잠시 눈물이 솟았다. 나 역시, 안 그런 척 애써도, ‘사람들에게서 받는 영광’에 얼마나 목매고 있었던지! 그날 그 서가 앞에서 주님께서는, 끝까지 자기 십자가에 매달려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야말로 참된 성공이요 영광의 자리라고 새삼 일러 주고 계셨다.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는 마시옵소서, … 영광일랑 오직 당신 이름에 돌려주소서”(최민순 역, 시편 113 하[115],1). 죽을 때까지 이 구절을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영광에서 영광으로”(「200주년 신약성서」, 2코린 3,18) 나아가는 거룩한 변모의 여정은 종내 요원할 것이다.
* 이글은 <경향잡지> 2023년 8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이연학 요나 신부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도회 수도자.
미얀마 삔우륀 성요셉수도원 책임을 맡고 있다..